사설.칼럼
【칼럼】조선 관리의 겸직(兼職)제도
안병일 = 본지 전북취재본부 비상근 주필
기사입력: 2019/07/03 [08:53]  최종편집: ⓒ 브레이크뉴스 전북판
김현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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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병일 = 글로벌사이버대 뇌교육융합학과 겸임교수 & 한국스카우트연맹 서울남부연맹 사무처장.     © 김현종 기자

조선은 유교정치 이념에 따라 권력의 독점을 막으면서 왕권과 신권의 조화를 이루는 통치 체제를 추구했다.

 

그 결과 의정부와 6조 중심의 통치체제가 마련됐다.

 

의정부는 재상들의 합의로 운영되는 최고 정무기구였으며 6조는 국가의 주요행정을 담당하였는데 그 아래 여러 관청을 두고 업무를 나누어 맡게 해 행정의 전문성과 효율성을 높였다.

 

또한 3사(사간원‧사헌부‧홍문관)는 언론 담당 기구로서 그 기능이 크게 강화되어 권력의 독점과 부정을 방지하려는 조선시대 정치의 특징적인 모습이다.

 

한편 국왕의 비서기관인 승정원‧정책집행과 전달‧국왕의 호위를 책임지는 선전관청과 국가의 큰 죄인을 다스리는 의금부는 왕권을 유지, 강화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로써 조선은 왕권과 신권이 조화된 통치체제를 갖추게 됐다.

 

이성계에 의하여 조선이 건국되자 곧바로 새로운 관제가 반포됐다.

 

따라서 신왕조 개국에 따른 문물, 제도의 정비라기보다는 고려 말의 관제를 거의 답습한 상태에 지나지 않았다.

 

조선왕조 성립 후 '경국대전'이 반포되기까지는 고려의 제도를 조선식 제도로 탈바꿈해가는 시기라 할 수 있다.

 

본 칼럼은 조선시대 관리의 겸직제도는 어떠했는지에 대해 겸선전관을 중심으로 고찰해봄으로써 현대의 공무원제도와의 차이점을 살펴보고자 한다.

 

겸선전관은 글자 그대로 일정 관직을 가지고 있으면서 선전관을 겸하는 관직이다.

 

겸선전관의 설치시기는 선전관의 설치와 같은 세조 3년이다.

 

세조 3년 3월에 선전관이 설치된 6개월 후 기존 문무관에게 선전관에 겸직하는 것을 허락했다.

 

조선 전기에 겸선전관을 설치한 것은 임금이 거둥(擧動) 할 때 호위하려고 설치하였고 선전관은 문신과 무신이 겸하기도 하였는데 처음 기록은 '세조실록'서 볼 수 있다.

 

이는 기존 관직에 겸직으로 선전관 임무를 맡기는 것이었고 또한 후보자 세 사람을 정하여 올릴 필요도 없이 한사람 추천으로 바로 임명하여 왕권 및 견고한 숙위 강화를 위하여 세조는 겸선전관을 언제 누구를 막론하고 임명하여 가까이에서 모시는 임무를 맡도록 하여 국왕 자신의 위엄과 권위를 세웠다고 볼 수 있다.

 

또한 특별한 행사에 재상‧판서와 같은 고관을 겸선전관으로 임명하여 임금의 행차를 수행하는(扈駕) 임무를 부여케 하기도 했다.

 

이는 정치적 여건에 따라 대체로 비중 있는 인물을 겸선전관에 임명하여 활용하였던 것이다.

 

성종 대에는 문신 중 무예가 출중한 자를 선발하여 겸선전관으로 임명하였으나 이는 문신의 출사를 열어주기 위한 장치였다고 볼 수 있다.

 

중종 2년에 사간원은 겸선전관을 더 두지 말 것을 청하였으나 중종은 허락하지 않았다.

 

이와 같은, 반대여론은 공신자제들의 출사를 열어 주기 위한 조치였기 때문에 대간들의 반대는 당연하다 보여 진다.

 

그에 따라 중종 2년 9월엔 겸선전관 10명으로 무과출신자를 선발하기도 했다.

 

이 같이 국가경비를 절약하기 위한 관직제도로는 겸직 관제를 들 수 있다.

 

겸직 관제는 행정체계상 예겸하게 되는 경우도 있었으나 국가경비를 줄이기 위하여 실시한 면도 적지 않다.

 

또한 고급관리에 대한 중요관직의 광범위한 겸직 관제의 시행은 구조상 분화되고, 정부기관 간의 통합적 조정을 함으로써, 행정 기능의 중앙집권화에 큰 도움을 주었으며(장동희 외) 겸직 관제는 녹봉절약 및 중앙집권적인 정치체제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관직제도였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조선왕조 건국과정이나 왕권강화와 국가체제 정비과정에서 드러나듯이 여러 차례의 공신이 배출되어 왔고 또 그에 못지않게 나름대로 공을 세운 원종공신 책봉자와 고위 관료집단들에게는 어떤 형태로든 그에 걸 맞는 예우가 필요하였음은 당연하다 할 수 있다.

 

이는 강력한 집권책에 대한 반발을 무마하고 왕권 강화를 도모하면서 한편으로는 신장된 신권(臣權)을 견제하기 위한 이중효과를 도모하는 수단이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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