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칼럼
【칼럼】조선국왕 경호원, 선전관의 인사규정
안병일 = 명지대학교 법무행정학과 객원교수
기사입력: 2019/12/11 [11:19]  최종편집: ⓒ 브레이크뉴스 전북판
김현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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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병일 = 명지대학교 법무행정학과 객원교수 & 본지 전북취재본부 주필.                                               © 김현종 기자

선전관(宣傳官)은 형명(形名)‧계라(啓螺)‧시위(侍衛)‧전명(傳命) 및 부신(符信)의 출납을 담당했던 무반 경관직(京官職)으로 정3품에서 종9품에 이르는 다양한 품계를 두고 있었다.

 

세조 3년(1458년) 3월에 설치됐으며 정원은 15명으로 구성됐다.

 

이후 세조 8년(1463년) 선전관 5명을 감축해 10명으로 축소한다고 했으나 정원 15명에 대한 인원은 5년 후인 세조 13년에도 "정난종‧한치의 등 15명을 선전관으로 임명한 것"을 보면 인원을 감축하지 않고 그대로 시행되고 있었다.

 

조선 전기 선전관의 인원과 품계를 살펴보면 경국대전에 "선전관은 8명으로 품계는 ‘정3품‧ 종3품‧종4품‧종5품‧종6품‧종7품‧종8품‧종9품’에 각 1명씩 총 8명을 두었다"고 기록돼 있다.

 

또 조선 전기의 선전관 증감을 보면 세조는 정상적인 방법으로 집권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시위와 궁중숙위에 큰 관심을 두고 15명의 선전관을 설치했으나 왕권이 비교적 안정된 성종과 중종시기는 8명의 선전관을 두고 운영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조선 중기는 임진왜란 이후 정치 및 군사조직 등에서 취약성을 드러내고(정시채) 조정에 대한 불신 등으로 인한 왕권의 약화 등으로 선전관을 38명(선조실록)으로 대폭 증원하였으며 광해군 또한 힘겹게 왕위에 오르고 계축옥사 등으로 인한 견고한 궁중숙위가 필요함으로 48명이라는 많은 선전관을 두고 운영했다.

 

조선 후기(영조이후)를 살펴보면, 속대전엔 "선전관 21명으로 품계는 '정3품 = 1명‧종6품 = 3명‧종9품 = 17명을 두었다'"고 집필돼 있고 대전통편에는 "선전관이 24명으로 되어 있다"로 서술돼 있다.

 

영조 시기에는 21명의 선전관 전원이 실무를 담당했으나 정조 시기에는 24명의 선전관 중 8명이, 고종 시기에는 25명의 선전관 중 8명만이 실직의 임무를 수행했다.

 

이는 선전관이 조선후기로 접어들면서 지벌(地閥)을 자랑하는 청환(淸宦)의 자리가 되었다고 보여 진다(최남선).

 

시대에 따른 선전관의 증감을 보면 ▲ 세조 = 15명 ▲ 선조 = 38명 ▲ 광해군 = 48명 등 왕권의 존립이 불안해 전제권을 강화하려고 노력했던 시기로 그 수의 증가를 볼 수 있다.

 

반면, 성종(8명)‧중종(8명) 같이 시대적으로 비교적 안정됐거나 관료권을 비교적 존중했던 시기에는 질적인 향상문제(성종실록)가 크게 대두된 것으로 선전관 자체가 국왕을 가장 가까이에서 모시던 최근시(最近侍) 무관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필자가 앞에서 시대별 정원에 대한 변천과정을 중요하게 살펴본 것은 시대적으로 왕권의 위상과 운영상의 시기별 양상과 변화상을 파악하는데 중요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관료의 인사평정을 살펴보면 관료의 성적에 따라 승진 및 전직을 결정하는 인사행정은 고려의 전통을 이어 조선에서도 도목정사라 지칭해 대체로 관료의 재직연수와 근무평정에 따라 매년 6월과 12월 두 번에 걸쳐 인사 조치를 행하는 것이 관례였다.

 

선전관의 도목정사는 경국대전 대전통편엔 "1월과 7월"에 2회, 속대전엔 "1월‧4월‧7월‧10월"에 4회 실시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이처럼 조선 전기에는 2회 근무성적을 평가하고 조선 후기(영조) 4회 근무성적을 평가하다가 다시 정조대에는 2회 근무성적을 평가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앞서 살펴본바와 같이 1년 2회의 근무평정이 관례인데 선전관은 국왕을 가까이에서 모시던 관직이기 때문에 한 때 4회 근무평정을 실시한 것으로 생각된다.

 

1년 4도목을 실시하는 까닭은 관리를 자주 교체하다 보니 관직후보자들의 사환욕을 다소나마 만족시켜주는데 있었고 또한 선전관이 임금을 가까이에서 모시던 관직인 관계로 난잡해서는 아니 되기 때문에(중종실록) 쓸모없는 사람을 교체하기 위해 1년에 4번의 근무평정을 실시한 것으로 필자는 해석하고 있다.

 

선전관은 국왕 자신의 신변보호와 왕권의 신장 내지는 강화를 위한 하나의 조치였으며 중앙집권제의 강화라는 정치적인 의도와 밀접한 관련 하에서 설치 운영되었던 제도 중 핵심을 이루는 기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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