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칼럼
【칼럼】조선국왕의 경호원, 선전관의 경제적 대우
안병일 = 명지대 법무행정학과 객원교수
기사입력: 2020/11/26 [08:30]  최종편집: ⓒ 브레이크뉴스 전북판
김현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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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병일 = 명지대 법무행정학과 객원교수.     © 김현종 기자

본 칼럼은 조선국왕의 경호실인 선전관청(宣傳官廳)에 근무하는 선전관(宣傳官)의 경제적 대우와 신분적 지위를 고찰해봄으로써 현대사회의 공무원제도와 다름을 살펴보고자 한다.

 

선전관은 서반관직 중 무반 청요직으로 항상 왕의 측근에서 보좌하는 관계로 문관의 한림(翰林, 예문관의 관리로 청요직으로 선망 받음), 옥당(玉堂, 홍문관의 별칭으로 국왕에게 학문적 자문을 하던 관청) 등의 관직과 비유되는 서반의 승지로 호칭되기도 하였다.

 

특히, 양반 관료사회에서 현관(顯官)으로서의 혜택을 누리며 후손에게는 음관으로서의 혜택이 주어져 당시 문관 우위의 사회 속에서 무반이 청요직(지위와 봉록이 높지 않으나 후에 높이 될 자리로 학식과 문벌이 높은 사람에게 시키던 벼슬로 요직임)으로 간주되기가 어려웠던 상황을 감안한다면 선전관의 지위는 상당하였던 것으로 생각되어 진다.

 

세조대에는 우의정 홍윤성ㆍ호조판서 노사신ㆍ도승지 윤필상 등으로 하여금 겸선전관으로 중종대에는 이조참의 성희안을 겸선전관으로 임명한 것은 문관 우위의 사회상을 표현하고 있다.

 

조선 전기의 선전관에 대한 경제적 대우는 전원 체아록이 주어졌다.

 

체아록은 조선시대 관료들에게 지급한 반대급부의 일 형태로 정해진 녹봉이 없이 네 계절로 평가한 근무성적의 높고 낮음에 따라 서로 바꿔 녹봉을 주던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서반직(무관)에는 광범위하게 체아록이 운영되었다.

 

중종 25년(1530년)전에는 선전관에게 입직의 근태를 근무성적으로 따져서 봉급을 주었는데 오늘은 그렇지 아니하다고 하였으니 이후 선전관의 대우가 어떠하였는지는 증빙할 수 있는 사료가 없어 밝힐 수는 없다.

 

하지만, 조선 후기인 영·정조대에 선전관과 겸관을 계속하여 체아록을 받게 한다는 기록으로 보아 체아록을 받았던 것으로 생각되어지며 남행선전관의 경우 임명 된지 6개월 후(6삭)에는 사과(정6품)에 상응하는 보수가 주어졌다.

 

선전관은 체아직에서도 가장 대우가 좋다고 생각되는 4계절의 평균 녹봉을 받도록(四孟朔連等受祿) 함으로써 타 체아직보다 안정적인 대우를 받았던 것으로 생각되고 또한 자손들에게 문음의 혜택을 받는 관직이기도 하였다.

 

선전관에 대한 법제적ㆍ경제적 대우에 대하여는 앞서 살펴 본 바와 같다. 무반직 중에서도 청요직 또는 현직으로 불리던 선전관은 신분적 대우에 있어서도 최고의 대우를 받았다고 볼 수 있다.

 

아울러 선전관의 신분적 지위를 살펴보면, 선전관은 자손이 음직을 물려받기도 했는데 선전관ㆍ부장 자손에게 문음의 혜택이 내려질 만큼 이들 무반직(무관)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조선왕조 건국과정이나 왕권강화와 국가체제 정비과정에서 여러 차례의 공신이 배출되어 왔고 또 그에 못지않게 나름대로 전쟁, 반정 등에서 공을 세운 원종공신과 고위 관료집단들에겐 어떤 형태로든 그에 걸 맞는 예우가 필요하였음은 당연하다 할 수 있다.

 

이러한 예우 등은 강력한 집권책에 대한 반발을 무마하고 국왕자신의 신변을 보호하며 왕권의 신장 내지는 강화를 도모하면서 한편으로는 신장된 신권(臣權)을 견제하기 위한 중앙집권체제의 강화라는 정치적인 이중효과를 도모하는 수단이었다.

 

아울러, 선전관이 국왕의 호위 숙위 등 군사적인 목적도 있었지만 예우차원에서 음직을 부여했다 볼 수 있다.

 

조선 전기 선전관의 신분이 세조 8년에는 5품관 이상으로 임명됐고 세조 10년에는 영의정ㆍ 좌의정ㆍ병조판서 등으로 하여금 강무선전관에 임명하였다.

 

선전관의 인원에 대한 증감을 보면, 세조는 정상적인 방법으로 집권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시위, 궁중숙위에 큰 관심을 두어 15명의 선전관을 설치하였으나 왕권이 비교적 안정된 성종ㆍ 중종 시기에는 승정원 승지와 비슷한 8명의 선전관을 두고 운영하였다.

 

아울러 임진왜란 이후엔 정치 및 군사조직 등에서 취약성을 드러내고 조정에 대한 불신 등으로 인한 왕권의 약화 등으로 선전관을 38명으로 대폭 증원하였으며 광해군 또한 힘겹게 왕위에 오르고 계축옥사 등으로 인한 견고한 궁중숙위가 필요함에 따라 48명이라는 많은 선전관을 설치하여 운영하였다.

 

선전관 입사자의 신분도 시대적 성격에 따라 변했던 것은 당연한 일로 동반(문관)임명이나 문ㆍ무과 출신자를 중심으로 입사시키는 경우도 있었고 문벌이 강화된 16세기 이후에는 문음 출신들이 대거 선전관으로 입사하였다.

 

특히, 문관은 한림 무관은 선전관이라 호칭될 만큼 안정적인 신분을 유지하고 있었으며 승정원의 승지는 청요직 이라 불리지 못한 반면에 선전관은 실록에 자주 청요직이라 불려 진 것으로 보아 국왕의 측근에서 승지와 동일한 기능을 갖고 중요한 참모역할을 수행하였다 여겨진다.

 

☞ 아래는 위 기사를 구글 번역이 번역한 영문의 '전문'이다.

【Below is the 'full text' of an English article translated from the above article with Google Translate.】

 

【Column】 Economic treatment of the Joseon King's bodyguard and propaganda

 Ahn Byung-il = Visiting Professor, Department of Legal Administration, Myongji University

 

This column attempts to examine the differences from the civil service system in modern society by examining the economic treatment and status of the propaganda officers who work in the Propaganda Office, the guard office of the King of Joseon.

 

Shenzhen Hall is an unban Qingyo post among the Seoban officials, and is always assisted by the king's aide. ), etc.

 

In particular, the yangban bureaucratic society enjoyed the benefits as a hallway, and descendants were given benefits as a sound hall. Considering the situation in which it was difficult to be regarded as an important job as a leader), the position of the propaganda officer seems to have been considerable.

 

The appointment of Woo Eui-jeong, Hong Yun-seong, Hojo Pan-seo, Labor and Sa-shin, Do Seung-ji, and Yoon Pil-sang as an adjunct war officer, and Jo-Cham Lee's Seong Hee-an as an adjunct war officer in Jungjong University, expresses the social image of civilian superiority.

 

The economic treatment of the propaganda hall of the early Joseon Dynasty was given to all members.

 

Chea-rok is a form of counter-benefit paid to officials in the Joseon Dynasty, meaning that no nok-bong was given to each other according to the high and low work scores evaluated in four seasons. Aroc was in operation.

 

25 years prior to King Joongjong (1530), a salary was given to a propaganda officer based on his work record, but today it was said that this was not the case.Therefore, there is no evidence of the propaganda officer's treatment, so it cannot be revealed.

 

However, it is believed that the record that the Yeong-Jeongjodae, in the late Joseon Dynasty, continued to receive the Chea-lock, and in the case of the South-bound Propaganda Hall, an apology was received six months after the appointment (6). ) Has been awarded.

 

It is thought that the Shenzhen Hall received more stable treatment than other Cheahjik by receiving the average green peak of the four seasons, which is considered the best treatment in Cheahjik, and it is also an official position that received the benefits of munum from their descendants. I did.

 

The legal and economic treatment of the propaganda hall is as previously discussed. Among the unemployed, the Propaganda Officer, who was called the Qing Yoo or the incumbent, received the best treatment in terms of status.

 

In addition, when looking at the status of the Shenzhen Hall, the children of the Shenzhen Hall inherited Eumjik, but they were so interested in these non-banjik (non-gwan) that the benefits of mun-eum were given to the descendants of the Propaganda Officer and the manager.

 

In addition, many times during the founding process of the Joseon Dynasty, reinforcing the kingship, and improving the state system, there have been many times of conviction. It is natural that it was necessary.

 

Such courtesy and courtesy are the political double of the reinforcement of the centralized system to prevent the rebellion against the powerful ruling policy, protect the king's own personal affairs, and promote or strengthen the kingship while on the other hand. It was a means of promoting the effect.

 

In addition, although the Propaganda Officer had military purposes such as the king's escort and detention, it can be seen that it was given a sound position in terms of courtesy.

 

In the 8th year of King Sejo, the status of the Propaganda Officer in the early Joseon Dynasty was appointed to more than 5 Pum-gwan.

 

When looking at the increase or decrease in the number of propaganda officers, Sejo was not in power in a normal way, so 15 people were installed with great interest in protests and court detention. Was operated.

 

In addition, after the Imjin Invasion, politics and military organizations revealed vulnerabilities, and the propaganda hall was greatly increased to 38 due to the weakening of the kingship due to distrust of the court, and the Gwanghae Army also struggled to ascend to the throne, and a solid court detention due to Gyechukoksa was required. A number of propaganda halls named Myeong were installed and operated.

 

It is a matter of course that the status of entering the Shenzhen Hall changed according to the characteristics of the times, and there were cases where appointment of companions (academic officers) or those from liberal arts and martial arts were selected.

 

In particular, the civilian officials maintained a stable status enough to be referred to as the Hallym military officer as the propaganda officer, and while the victory of the seungjeongwon was not called the qingyojik, the propaganda hall was often referred to as the qingyojik in the Annals. It is believed to have performed an important staff ro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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