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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보훈처 '10월의 독립운동가' 선정
민족의식 고취시킨 나운규 선생 ⋅ 경찰 강삼수 경위
김현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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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6/10/05 [1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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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가보훈처가 2016년 10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한 민족의식을 고취시킨 독립군 출신 영화감독 춘사 나운규(왼쪽) 선생과 6.25 전쟁영웅에 강삼수(오른쪽) 경찰 경위.   / 사진제공 = 전북서부보훈지청     © 김현종 기자


 

 

 

전북서부보훈지청은 "국가보훈처가 광복회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201610월의 독립운동가로 민족의식을 고취시킨 독립군 출신 영화감독 나운규 선생과 6.25 전쟁영웅에 강삼수 경찰 경위를 선정했다"5일 밝혔다.

 

나운규는 19021027일 함경북도 회령에서 출생했으며 회령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간도의 명동중학(明東中學)에서 수학했고 1919년 회령에서 3.1운동에 참여한 뒤 연해주로 건너가 러시아 백군의 용병으로 활동했다.

 

하지만 목숨을 건 용병 생활에 대한 회의를 느끼고 북간도로 돌아온 후 은사였던 박용운(朴龍雲)을 따라 독립군이 간도에서 회령으로 진격하기 전 터널이나 전신주를 파괴하는 임무를 띤 결사대인 도판부(圖判部)에 가입했다.

 

나 선생은 전문적인 훈련을 받기 위해 청산리로 이동하던 중 공부를 통해 더 큰 독립운동을 할 수 있다는 충고를 듣고 독립군 부대를 나와 서울 연희전문학교에 입학하기 위한 예비과정에 입학했다.

 

그러나 일제가 도판부 관련 비밀문서를 획득하면서 박용운 등과 함께 피체됐다.

 

재판에 회부된 나운규는 보안법 위반으로 2년 형을 언도받고 19213월부터 19233월까지 청진형무소에서 복역한 뒤 19233월 출소 후 예림회와 조선키네마주식회사에 입사하면서 영화인의 길을 걷게 된다.

 

조선키네마주식회사의 두 번째 작품인 "총희의 연"에서 가마꾼으로 데뷔하고 "심청전장한몽농중조"등의 영화에 연거푸 출연하면서 특색 있는 배우로 주목을 받는 등 1926101일 "아리랑"을 제작했다.

 

이후, 6.10 만세운동의 열기를 스크린으로 그대로 옮겨놓은 것 같다는 평가를 받은 이 영화는 일제강점기 내내 전국 방방곡곡에서 상영됐고 나운규는 '아리랑'이후 제작한 '풍운아금붕어'등이 흥행하면서 조선영화계의 스타가됐다.

 

1930년부터 음성영화인 '토오키(talkie)' 영화가 상영되기 시작하면서 조선영화의 제작은 극도로 위축되자 1935년 나운규는 '아리랑'을 토오키 영화로 제작하기 시작했으나 동시녹음 실패와 재녹음 과정에서 막대한 손해를 입게 되고 폐병을 얻어 몸은 극도로 쇠약해졌다.

 

나운규는 원산만프로덕션의 지원을 받아 1937년 토오키 영화 오몽녀를 제작하면서 재기에 성공했으나 몸이 완쾌되지 않은 상황에서 무리하게 활동한 결과, 지병인 폐병이 악화돼 19378936세의 나이로 순국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고인의 활동을 기려 1993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6.25 전쟁영웅으로 선정된 경찰 강삼수 경위는 지리산에서 게릴라 활동을 하던 북한군을 소탕하는데 큰 공을 세운 인물이다.

 

1950915일 인천상륙작전과 그 해 928일의 서울 수복으로 인해 갑자기 남쪽에 고립된 북한군은 지리산에 들어가 게릴라 활동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19484월 순경으로 채용된 강삼수는 이 무렵 사찰 유격대장으로 임명을 받고 그 지역의 북한군 무장 세력과 빨치산을 소탕하는 등 경찰관으로서 주민과 지리산을 지켜내는데 큰 공을 세웠다.

 

특히 산청경찰서 사찰유격대장 재직 중인 195111월 국수봉에 북한군이 집결 중이라는 제보를 받고 북한군의 퇴로에 매복조를 배치, 새벽 1시경 기습 공격해 23명을 사살한 바 있다.

 

강삼수의 부대는 10명 내외의 적은 인원임에도 불구하고 주변 산세의 지형지물과 지리를 철저히 활용해 수많은 적과의 전투에서 지속적인 승리를 거뒀다.

 

이러한 전공으로 강삼수와 그의 부대는 "지리산의 귀신"으로 불리며 적군에게 커다란 공포를 줬다.

 

62회의 크고 작은 전투(322명 사살61명 생포)를 승리로 이끌며 국군의 정예병력 못지않은 혁혁한 전공을 세운 강삼수와 그의 부대로 인해 지리산은 안정을 되찾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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