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칼럼
【기고】로마와 유대 전쟁의 발발
한국기독교연합(KCA) 교육전문위원 이한규 목사
김현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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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8/05/13 [0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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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기독교연합(KCA) 교육전문위원 이한규 목사.          © 김현종 기자

【지난호에 이어로마의 총독(행정장관) 플로루스는 사면초가(四面楚歌) 상태에서 어떻게 손을 쓸 수 없었다.

 

시리아 지방 총독 C. 세스티아스 갈루스가 플로루스를 구출하기 위해 1개 군단과 수많은 외인 보조 부대를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진군했지만 막대한 병력을 잃고 퇴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유대 반도들은 전국을 장악하였다.

 

로마가 가까운 시일 내에 대군을 이끌고 예루살렘을 공격할 것이 뻔한 상황에서 유대인들은 서둘러 도성 방어를 강화하였다.

 

예루살렘 외의 지역에서도 유대인들의 반란과 저항이 계속되어 서로 죽이고 죽는 일이 계속되었다.

 

마침내 예루살렘을 지키던 로마 수비대가 공략 당했고 예루살렘은 반란자들의 수중에 들어갔다.

 

유대인들은 매일 로마 황제에게 올려지던 제물 헌납을 금지하였다.

 

이것은 로마 제국에 대한 공개적인 선전포고를 의미하였다.

 

왜소한 예루살렘이 대로마 제국에 도전하였던 것이다.

 

로마와의 대대적인 피의 전투는 피할 수 없는 것이었다.

 

유대교의 광신자들과 과격한 애국자들 및 열심당원들은 단결하여 외세를 몰아내자고 끊임없이 외쳤다.

 

안디옥에 있던 로마군 지휘관 케스티우스는 6개 보병대대와 4개 기병대 및 여러 왕들이 보낸 원군을 거느리고 예루살렘으로 진격하여 방패를 하늘로 향하게 하고 성벽 밑을 허는 '거북이 전법'을 쓰는 한편 성전 문에 불을 지를 준비를 다 갖추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용감하게 싸워 로마군을 공격했고 로마군은 참패를 당하고 퇴각했다.

 

기세등등하게 예루살렘으로 향했던 로마군은 1개 군단 병력이면 손쉽게 진압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하지만, 5만명이 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유대인 저항군들의 저항은 격렬했다.

 

결국 로마는 첫 전투에서 패해 후퇴한다.

 

유대인들은 후퇴하는 로마군을 또 다시 습격해 이 전투에서 모두 보병 5,300기병 380명을 몰살한다.

 

1개 군단 전체를 궤멸시킨 것이다.

 

유대인들은 뜻밖에 케스티우스를 이기면서 의기양양해졌다.

 

로마와의 전쟁을 반대하는 사람들도 강압과 설득으로 힘을 합치게 하고 전쟁을 대비해 많은 지역에 군대장관들을 임명하고 전쟁에 대비해 나갔다.

 

하지만, 로마는 이빨 빠진 호랑이가 아니었다.

 

이 때 제사장 가문 출신으로 후에 유대 역사가로 유명한 요세푸스(Flavius Josephus)가 갈릴리 지역의 군대장관으로 임명된다.

 

요세푸스는 머지않아 로마가 갈릴리를 침공해 올 것을 알고 요타파타를 비롯한 여러 곳에 성벽을 쌓고, 곳곳을 요새화했다.

 

또한 갈릴리 지역에서 10만 명 이상의 젊은이들을 소집하여 군대를 편성하고 구식 무기들을 나누어 주었다.

 

그리고 병사들을 훈계하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요타파타의 함락

 

당시 네로 황제는 자신이 직접 만든 노래를 공연하기 위해 그리스에 머물고 있었다.

 

황제는 로마군의 참패 소식에 대노한다.

 

그리고 당대의 명장 베스파시안을 총사령관으로 임명해 유대 반란을 진압하도록 했다.

 

이번에는 정예 3개 군단이 투입되었다.

 

베스파시안 장군은 젊어서부터 외국 원정에 참가하여 전장에서 잔뼈가 굵은 백전노장이었다.

 

네로의 부친 클라우디우스가 영국을 땀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영토를 병합시킬 수 있도록 30차례나 전투를 치른 전투에서 혁혁한 무공을 세운 당대의 명장이었다.

 

베스파시안은 가장 우수한 3개 군단과 수많은 외인부대를 이끌고 북쪽에서 갈릴리를 공격하였다.

 

그의 아들 타이터스(Titus)가 부장(副將)으로 참전했다.

 

드디어 베스파시안은 갈릴리 지역으로 진군해 왔고 갈릴리 지역에서 가장 막강한 요새인 요타파타(Jotapata)를 맹렬한 기세로 공격했다.

 

공성 장비를 요타파타 주위에 배치하여 돌과 창을 쏟아 부었다.

 

이에 맞서 요세푸스는 말뚝 위에 바로잡은 소의 가죽을 덮어씌워 방패막을 만들어 방어했다.

 

베스파시안은 유대인들이 굶어 죽을 때까지 성을 포위하는 전략을 구사했다.

 

여름철 요타파타 안에는 물이 부족했지만, 유대인들은 빗물로 버티면서 옷을 물에 흠뻑 적셔 성벽이 물에 젖도록 하는 위장 전술을 쓰며 싸웠다.

 

로마군들은 성 안에 물이 많은 줄 알고 놀랐다.

 

유대인들은 양가죽을 뒤집어쓰고 로마군이 보아도 개나 다른 동물처럼 보이게 해서 성 밖에서 몰래 물을 가지고 들어왔다.

 

유대인들은 어차피 죽을 수밖에 없게 된 상황이라 굶주림과 갈증으로 죽기보다는 전쟁하다 죽기를 원했다.

 

베스파시안은 수양의 머리처럼 생긴 공성 망치를 이용해 성벽을 집중적으로 강타했고, 유대인들은 왕겨를 가득 담은 부대를 공성 망치가 집중적으로 강타하는 성벽 앞에 매어 달아 방어했다.

 

그리고 로마군의 공성 장비와 방패막에 역청과 수지(樹脂)와 유황이 섞인 물건들을 모아 화공(火攻)을 가하며, 로마군이 사닥다리를 타고 성벽으로 기어오르자 끓는 기름을 갖다 부었다.

 

베스파시안은 그냥 함락시칼 수 없음을 깨닫고 토성을 더 높이 쌓으라고 지시했다.

 

그 위에 높이 50피트 망대 3개를 세웠는데, 그 목재를 충당키 위해 예루살렘 주변 사방 18km내의 나무들을 완전히 벌목하여 황무지가 되었다.

 

로마군의 공성 개시 47일째 되는 날 토성은 성벽보다 높아졌다.

 

"날이 이를찌라 네 원수들이 토성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누가복음 1943)."

 

그런데 유대인 변절자가 탈주해서 투항하고는 예루살렘성의 상황과 유대인의 경계가 취약한 시간을 알려주었다.

 

이에 티투스를 비롯한 몇몇 로마군이 소리 없이 성벽으로 접근하여 파수병의 목을 자르고 로마군이 진입하여 마침내 성을 함락시켰다.

 

로마군들은 그 동안 겪은 어려움을 생각하고 주민들을 닥치는 대로 살해하였다.

 

요타파타의 함락을 전후해서 로마군에게 살해된 유대인은 총 4만명에 달하였고, 유대인이 숨은 곳은 샅샅이 찾아내어 죽이고, 부녀자와 어린아이들 1200명을 포로로 사로잡아 간다.

 

한편, 로마군은 요세푸스에 대한 원한이 사무쳤다.

 

베스파시안은 요세푸스를 생포하기 원했고, 요세푸스는 큰 구덩이 옆에 있는 동굴에 숨어 있었다.

 

3일째 되는 날 요세푸스와 함께 숨어 있던 여인이 로마 병사에게 체포되는 바람에 요세푸스의 은신처는 들통이 나고, 요세푸스는 옛날부터 안면이 있고 잘 아는 로마 군단 지휘관 니카노르의 진심어린 투항 권유를 받고, 그것이 하나님의 섭리와 뜻이라고 여겨 투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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