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문화연구원장이자 역사학자인 심백강 박사가 최근 “잃어버린 상고사 되찾은 고조선(출판=바른역사)”이란 책을 내놨다. 심 박사는 "사고전서"를 통해, 우리의 조상인 고조선이 중국 북경을 넘어 요서까지 통치했다는 기록을 찾아냈다. 잃어버렸던 웅대한 고조선을 되찾은 것. 우리가 상고사를 잃어버리게 된 주요 원인에 대해, 심 박사는 “조선왕조에서 사대주의자들의 고조선 사료 은폐, 일제 강점기의 파기와 유실, "삼국사기"·"삼국유사" 기록의 부실과 "한단고기"의 한계 등에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심박사의 저서 “잃어버린 상고사 되찾은 고조선” 중 “제6장 되찾은 고조선, 그 의미와 남은 과제”를 요약, 소개한다.
▲잃어버렸던 고조선의 역사자료를 찾아낸 역사학자 심백강 박사. ©브레이크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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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잃어버린 고조선사를 되찾았다고 말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김부식의 "삼국사기"가 빠뜨린 고조선 사료, 일연의 "삼국유사"가 미처 참고하지 못했던 고조선 사료, 사대 식민주의자들이 꼭꼭 숨겨놓고 밝히기를 꺼린 고조선 사료들을 한 · 중 · 일 삼국이 모두가 인정하는 사료의 보고인 "사고전서"에서 찾아냈기 때문이다. 이번에 "사고전서"에서 찾아낸 고조선 사료들은 중국 송나라 시대 이전의 것들로서 시기적으로 모두 김부식과 일연의 "삼국사기"·"삼국유사"보다 앞선다. 특히 북주시대에 유신(庾信)이 쓴 신도비문은 지금으로부터 1500년 전의 금석문(金石文)으로 그 사료적 가치가 매우 높다. "삼국사기"·"삼국유사"에 포함되지 않은 고조선의 비자료, 사대 식민주의자들이 숨겨 왔던 고조선의 숨은 자료들이 지금 새롭게 밝혀짐으로써 영원히 잃어버린 줄 알았던 우리의 위대한 요서고조선의 역사는 베일을 벗고 다시 그 정체를 드러냈다. 아래에서 고조선을 되찾았다고 말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좀 더 상세하게 설명하기로 한다.
▲조선하朝鮮河와 고조선
"무경총요(武經總要)"는 북송(北宋) 때 군사제도와 군사이론을 기록한 중국 최초의 관찬병서(官撰兵書)이다. 산천·지리와 관련된 내용을 상세히 기술하고 있어 당시 송나라가 처한 지리적 역사적 상황을 살피는 데 매우 귀중한 참고자료가 된다.
북송 때는 오늘날의 하남성 개봉시(開封市)가 송나라의 수도였고 북경지역은 요(遼)나라 영토에 소속되어 처음에는 남경(南京)이라고 했다가 나중에 다시 연경(燕京)으로 변경되었다. 그러므로 "무경총요"에서는 연경이 송나라의「변방(邊防)」 부문에 편입되어 그 산천과 지리가 다루어지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특기할 사항은 연경의 지리를 설명하는 내용 가운데 조선하(朝鮮河)라는 이름이 등장한다는 사실이다.
당시 요나라 수도 중경中京은 오늘날의 내몽고자치구 적봉시(赤峰市) 영성현(寧城縣)에 자리 잡고 있었다. 따라서 연경에서 요나라의 수도 중경에 가려면 북문北門을 나가서 고장성古長城을 지나고 망경(望京) (지금의 북경시 조양구 망경), 온여하 · 순주 (지금의 북경 순의구), 단주 (지금의 북경 밀운현), 고북구(古北口)를 거쳐서 북쪽으로 가게 되어 있었다. 그런데 고북구에 당도하기 전에 먼저 조선하를 건너서 간다고 이 책은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조선하는 오늘날의 어떤 강을 가리키는 것일까. “연경에서 중경을 가는 도중에 조선하를 지나서 고북구에 도달한다”라고 한"무경총요"의 기록에 따르면 조선하는 고북구 서쪽에 위치해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현재 중국지도상에서 찾아보면 조하(潮河)는 고북구 서쪽에 있고 난하(灤河)는 고북구 동쪽에 있다. 이는 바로 오늘의 조하潮河가 송나라 때는 조선하로 불렸다는 확실한 증거가 된다.
"무경총요"는 지금으로부터 근 천여 년 전인 1044년에 편찬되었다. 시기적으로 볼 때 여기서 말하는 조선하는 500년 전에 압록강 이남에 건국되었던 이씨조선과는 전혀 무관한 것이다.
조선하가 압록강 이남 지역의 평양이나 서울 일대가 아닌 북경 부근에 있었다는 것은 고대의 조선은 한반도가 주무대가 아니라 대륙 깊숙이 중원의 요서지역에 자리하고 있었던 사실을 단적으로 증명한다.
"무경총요"는 "삼국사기"·"삼국유사" 보다 수백 년을 앞서 편간된 책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김부식과 일연은 그들의 저서에서 이런 중요한 기사들을 빠뜨렸다.
조선하가 북송시기에 오늘의 북경시 북쪽 고북구 인근에 있었다는 사실을 오늘에 전해준 "무경총요"는 잃어버린 요서고조선의 역사를 확실히 되찾게 해준 매우 획기적인 귀중한 자료라고 하겠다.
그리고 우리가 1,000여 년 전에 북경시 부근에 조선하가 존재하고 있었던 것을 사실로 믿을 수밖에 없는 이유가 또 있다. 그런 기록이 "무경총요"에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보다 앞서 쓰여진 왕증(王曾)의 "왕기공행정록(王沂公行程錄)"에도 보인다는 사실이다.
왕증(978~1038)은 송(宋)나라 왕조에서 직사관(直史館) · 사관수찬(史館修撰) 같은 벼슬을 역임하면서 역사편찬에 직접 관여하기도 했다. 벼슬은 나중에 군사기구의 최고 장관격인 추밀사(樞密使)에 올랐고 재상을 두 차례나 역임하기도 했다. 그리고 기국공(沂國公)에 봉해졌다.
"왕기공행정록"은 왕증이 송나라의 특사로 요나라에 사신으로 갈 때 기록한 내용이다. 송나라 변경에서 요나라 수도 중경, 즉 오늘의 내몽고 영성현까지의 중간 경유지를 일정표 형식으로 적은 것인데 후인들이 그가 기국공에 봉해졌기 때문에 이를"왕기공행정록"이라고 이름을 붙인 것이다.
왕증 정도의 비중 있는 인물이 “조선하의 별칭이 칠도하(七度河)이며 이를 건너서 고북구에 당도했다”라고 행정록에서 기록했다면 우리는 그 기록을 사실로 믿어도 좋을 것이다.
또한 시기는 좀 뒤지지만 조선하에 대한 기록은 "석진지(析津志)"에도 보인다. "석진지"는 원元나라 말엽의 학자 웅몽상이 원나라 대도(大都) 즉 오늘의 북경에 대해 기술한 책이다.
그런데 북경의 역사를 전문으로 다룬 북경지방사지(北京地方史志)인 "석진지"에 조선하와 습수(濕水)가 등장한다. 이는 "무경총요"나 "왕기공행정록"과 일맥상통하는 기록이다.
지금 조하는 말이 없다. 그저 침묵 속에 하북성 동쪽을 흐를 뿐이다. 그러나 1,000년 전의 중국인에 의해 쓰여진 "무경총요"와 "왕기공행정록"은 그 강의 본래 이름은 조하가 아니라 조선하였다는 사실을 웅변으로 입증해주고 있다.
조하는 1,000년 만에 잃어버린 본래 이름을 되찾았고 고조선은 1,000년 만에 잃어버린 요서조선의 역사를 되찾았다. 2014년 갑오년은 우리 밝달민족의 역사광복에 있어 뜻 깊은 해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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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기(朝鮮記)"와 고조선
고대사는 사료가 생명이다. 고조선사(古朝鮮史)를 연구하는 데 있어 최대의 걸림돌은 사료가 부족하다는 것이다. "삼국사기"에서는 고조선사를 아예 다루지 않았다. "삼국유사"에서는 제1권 고조선 조항에서 단군조선과 기자조선을 언급하고 있으나 2천년에 달하는 고조선 역사기록이 단 몇 줄에 지나지 않는다.
오늘날 고조선사가 실제 역사가 아니라 신화에 지나지 않는다거나 또는 원나라 때 항몽 의식을 고취하기 위해 만들어진 역사라는 이러한 허튼 소리가 나오는 이유를 사료의 빈곤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그렇다면 고조선은 과연 당시의 직접 사료가 존재하지 않는 만들어진 신화에 불과한 것인가.
"산해경(山海經)"은 총 18편으로 구성된 동아시아에서 지리를 전문으로 다룬 가장 오래된 책이다. 청清나라 때 학자 오임신吳任臣은 "산해경광주(山海經廣注)"라는"산해경"에 대한 주석서를 펴냈다. 진(晉)나라 곽박(郭璞)의 "산해경주(山海經注)"를 바탕으로 그것을 보완하는 형식을 취했기 때문에 이름을"산해경광주"라고 한 것이다.
오임신의 "산해경광주"에는 고조선사와 관련해서 매우 중대한 사실이 언급되어 있다. "산해경"에 나오는 「해내경(海內經)」과 「대황경(大荒經)」이 모두"조선기" 즉 고조선의 역사를 기술한 "고조선사기(古朝鮮史記)"라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청나라 사람 오임신의 주장은 아니다. 그가 「해내경」에 대해 설명하면서 「대황경」과 「해내경」을 모두 "조선기" 로 간주했던 송나라 나필(羅泌)이 지은"노사(路史)" 의 주를 인용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임신이 "산해경광주"에서 나필의"노사" 주석을 인용하였다는 것은 오임신 역시 그러한 견해에 동의하였음을 반영한다.
"산해경" 안의 「해내경」을 고대조선의 역사를 기록한 "조선기" 로 간주한 것은 비단 송나라 사람 "노사" 의 주석에 국한된 것이 아니다. 중국의 다른 여러 문헌들에서도 그와 같은 관점들을 확인할 수가 있다.
예를 들어 "설략(說略)" · "광박물지(廣博物志)" · "산서통지(山西通志)" · "지유(識遺)" · "산대각주초사(山帶閣註楚辭)" · "의요(疑耀)" ·"명의(名疑)" · "강한총담(江漢叢談)" 등과 같은 저서들에서도 역시 「해내경」 을 "해내조선기(海內朝鮮記)" 또는 "조선기"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대황경」과 「해내경」은 그 내용상으로 볼 때 중원中原의 역사 기록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그래서 "한서(漢書)" 「예문지(藝文志)」에서도 "산해경"을 소개할 때 13편이라 하고 「대황경」 이하 5편은 "산해경"에 포함시키지 않았다.
혹자는"산해경"에 포함된 「대황경」 이하 「해내경」까지의 다섯 편을 선진(先秦)시대의 사료가 아닌 서한(西漢)시대 유흠(劉歆)의 저술로 보기도 한다.
그러나 송나라 시대에 저술된"노사"의 주석에서「해내경」을 "조선기"로 표현하고 있는 것을 보면「대황경」과 「해내경」은 유흠의 저술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본래 조선의 역사를 기록한 "조선기"였던 것을 서한시대에 유흠이 황실의 도서를 정리하면서 "산해경"에 잘못 포함시켰을 가능성이 크다.
「해내경」은 조선국에 대한 설명으로부터 서두가 시작된다.「대황경」에서는 소호국(少昊國) · 군자국(君子國) · 백민국(白民國) · 숙신씨국(肅愼氏國)과 함께 요임금 · 순임금 · 치우 등에 대해 다루고 있다. 그 전체 내용상으로 볼 때, 고조선 사람이 고조선의 건국 이전과 이후의 역사를 직접 기록한 "고조선사기(古朝鮮史記)" 라고 보아 큰 무리가 없을 듯하다.
「대황경」과 「해내경」이 바로 고대 조선의 역사를 기록한 "조선기"가 확실하다면 우리는 상고사연구에서 사료의 빈곤이라는 난제에서 벗어나게 된다. 고조선은 만들어진 신화가 아니라 실재 역사라는 사실을 당시의 직접 기록을 통해 뒷받침하게 되어, 잃어버린 고조선의 실체를 되찾는 일이 꿈이 아니라 현실로서 다가오게 된 것이다.
다만 김부식과 일연이 일찍이 이런 사료들을 참고하여 "삼국사기"·"삼국유사"에 포함시키지 못하고 빠뜨렸고 "고조선비사" 와 같은 상고사 사료들은 유실된 탓으로 한국사가 망가 질 대로 망가진 오늘날에서야 이런 사료들을 접하게 된 것이 천추에 한스러울 따름이다.
▲조선성朝鮮城과 고조선
한국인 가운데 중국 하북성의 노룡현(盧龍縣)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하북성 동부 청룡하(青龍河) 하류에 위치한 노룡현은 현재 행정구역상으로 하북성 진황도시(秦皇島市)에 소속되어 있으며, 진황도시는 북대하구(北戴河區) · 창려현(昌黎縣) · 무녕현(撫寧縣) · 해항구(海港區) · 노룡현 · 청룡만족자치현(靑龍滿族自治縣) · 산해관구(山海關區)를 포함하고 있다.
중국의 수도 북경시 동쪽에 위치한 진황도시는 발해를 마주하고 있어 풍광이 매우 아름답다. 여름철이면 모택동이 수영을 즐겼던 곳으로, 중국공산당 간부들의 피서지로 유명한 북대하(北戴河), 또 명나라 이후 중원과 동북을 가르는 관문인 산해관 등이 바로 이 진황도시 소속으로 노룡현과 이웃하여 있다.
그런데 이곳 노룡현에 “조선성이 있다”라는 기록이 송宋나라 때 낙사(樂史)(930~1007) 라는 학자가 편찬한 지리총서인"태평환우기(太平寰宇記)"에 실려 있다.
송나라의 하북도(河北道) 평주(平州)는 오늘날의 중국 하북성 동쪽의 당산시(唐山市) · 진황도시 일대에 해당하는 지역으로서 노룡(盧龍) · 석성(石城) · 마성(馬城) 3개 현을 관할하고 있었다. 그런데 "태평환우기"는 노룡현 조항에서 고죽성(孤竹城) · 요서성(遼西城)과 함께 조선성을 소개하고 있는 것이다.
"태평환우기"에 의하면 고죽성 다음에 조선성, 조선성 다음에 요서성의 순서로 기록하였다. 이것은 고죽성 부근에 조선성이 있고 조선성 인근에 요서성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만일 고죽성 · 조선성 · 요서성이 거리상으로 서로 멀리 떨어져 있었다면 이런 순서에 따라 기록하지 않았을 것이다.
고죽국(孤竹國)은 주(周)나라가 은(殷)나라를 침략하여 멸망시키자 주나라를 섬기기를 거부하고 수양산에 들어가 고사리를 캐먹으며 살다가 죽은 것으로 유명한 백이(伯夷) · 숙제(叔齊)의 나라이다. 백이 · 숙제의 나라가 송나라 때의 평주 노룡현에 있었다. 그러므로 거기에 고죽성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송나라 때 노룡현이 한(漢)나라 때는 비여현(肥如縣)으로서 요서군(遼西郡)의 군청 소재지가 이곳에 있었다. 그러므로 여기에 요서의 폐성(廢城)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밝달민족의 첫 국가 고조선과 동일한 이름을 가진 조선성이 왜 송나라의 하북도 평주 노룡현 지역에 고죽성 · 요서성과 함께 폐성으로 남아 있었던 것일까.
"태평환우기"의 저자 낙사는 노룡현에 있는 조선성을 소개하면서 “조선성은 바로 기자箕子가 봉함을 받은 지역이다. 지금 황폐한 성이 남아 있다(朝鮮城即箕子受封之地 今有廢城)”라고 설명하고 있다.
은나라의 왕족이었던 기자는 은나라가 망하자 조선으로 떠나갔다. 이에 관한 기록은"상서대전(尙書大傳)" · "사기史記"를 비롯한 수많은 중국 문헌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런데"태평환우기"의 설명은 그 당시 기자가 찾아갔던 조선은 오늘의 대동강 유역 평양에 있던 한반도 조선이 아니라 하북성 동쪽 조하 유역 노룡현에 있던 요서조선이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결정적인 단서가 된다.
노룡현은 수(隋)나라 개황(開皇) 18년(598)에 신창현(新昌縣)을 개정하여 최초로 설치되었다. 그 이후 당(唐) · 송(宋) · 원(元) · 명(明) · 청(淸) 등을 거치면서 북평군(北平郡) · 평주(平州) · 영평로(永平路) · 영평부(永平府) 등으로 소속은 여러 차례 바뀌었지만 노룡현이라는 이름에는 변화가 없었으며, 1985년 하북성 진황도시 관할로 되었다.
지금은 노룡현이 진황도시 관할로 되어 있지만 송나라 때는 평주에 소속되어 있었다. “평주 노룡현에 조선성이 있다”라는 "태평환우기"의 기록을 단순히 이 기록 하나만 놓고 보면 얼른 수긍이 가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를 “북해(발해)의 모퉁이에 나라가 있는데 그 이름을 조선이라 한다”라고 말한 "산해경", “중국 남쪽 송나라에서 북방 요나라 서울 영성으로 갈 때 하북성 고북구 부근에 있는 조선하를 건너서 갔다”라는 "무경총요"와 "왕기공행정록", “선비족 모용외가 조선 땅을 기반으로 발전했고 모용황이 조선공(朝鮮公)에 봉해졌다”라는 두로공신도비문, “갈석산 부근에 조선국이 있었다”라는 "회남자(淮南子)"의 기록 등과 대조하여 본다면 기자가 찾아갔던 그 조선은 대동강 유역 평양이 아닌 하북성 조하유역 평주 노룡현 지역에 있었다는 사실이 확신으로 다가오게 된다.
우리의 사서인 "삼국사기"·"삼국유사"에는 요서조선에 대한 명확한 기록이 거의 없다. 그러나 중국 송나라 때의 사서인 "태평환우기"에서는 현재의 하북성 진황도시 노룡현에 조선성 유적이 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우리는 "태평환우기"가 남긴 조선성 기록을 통해, 압록강 이동의 대동강 조선에 앞서 압록강 서쪽의 발해만 부근에 있었던 요서조선의 실체를 오늘에 다시 되찾게 된 것이다.
▲조선공(朝鮮公)과 고조선
모용황(慕容皝)(297-348)은 중국의 십육국시기 전연(前燕)의 창건자이다. 그는 조선족이 아니라 선비족(鮮卑族)이었고 한반도 사람이 아니라 요서 창려(昌黎) 사람이었다. 그가 생존한 시기는 이씨조선이 건국되기 1,000여 년 전이었고 그가 주로 활동한 무대는 오늘의 서랍목륜하(西拉木倫河) 유역이었다.
그런데 "진서(晉書)" 109권 「재기(載記)」 <모용황전>에는 요서에서 활동하던 창려 사람 선비족 모용황이 전쟁에 참가하여 용감히 싸운 공로로 325년 조선공에 봉해졌다는 기록이 나온다.
모용황은 선비족 모용외(慕容廆)의 아들로 태어나 요서지역에서 주로 활동하던 인물이다. 더구나 그가 군공(軍功)을 세워 조선공으로 봉해지던 젊은 시절에는 그의 행동반경은 선비족의 근거지인 오늘의 서랍목륜하 상류 일대를 벗어나지 않았다. 그런데 그에게 어떻게 조선공을 봉할 수 있었을까.
모용황이 활동하던 진나라 시대의 기록인 "진서"에는 당시 낙랑군(樂浪郡)이 평주에 설치되어 있고 낙랑군의 수현(首縣)으로서 조선현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모용황은 진나라 때 사람이니 그가 봉해진 조선은 바로 이 당시 평주의 조선현일 것이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여러 지역 가운데서 조선현을 골라 특별히 그에게 조선공으로 봉한 것은 그가 조선과 직간접으로 관련이 있어서였을 가능성이 많다.
"진서"에 기록된 낙랑군 조선현은 모용황이 활동하던 지역인 시라무렌강 유역 부근 요서에 있었고, 그 아버지 모용외를 비롯한 선비족의 조상들은 조선의 옛 땅을 근거지로 성장 발전했으며, 조선은 역사적으로 문화적으로 모용씨(慕容氏)와 깊이 관련되어 있었기 때문에 전공을 세운 그에게 보답하는 의미에서 특별히 조선공을 봉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인 해석일 것이다.
그동안 식민사관은 대동강 유역에 낙랑군이 있었고 조선현이 거기에 수현으로서 존재했다고 주장해 왔다. 그러나 시라무렌강 유역에서 활동하며 전공을 세운 모용황에게 아무런 연고나 관련도 없는 수천 리 떨어진 조선현을 떼어서 그에게 봉지로 준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다.
지금으로부터 1689 년 전인 서기 325년 요서의 창려 사람 선비족모용황에게 조선공을 봉했다는 "진서(晉書)"「재기(載記)」 <모용황전>의 기록은 당시 고조선이 대동강 유역이 아닌 요서에 있었다는 것을 밝혀주는 결정적 단서로서 이는 잃어버린 요서고조선을 되찾는 데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할 것이다.
▲조선국(朝鮮國)과 고조선
상고사를 연구하는데 있어서 금석문만큼 중요한 사료는 없다. 문헌사료는 뒤에 얼마든지 내용의 위 · 변조가 가능하지만 금석문은 한번 글자를 새겨 넣은 다음에는 위조나 변조가 용이하지 않기 때문이다.
두로공 신도비(豆盧公神道碑)는 중국 남북조시대에 북주에서 농우총관부장사(隴右總管府長)史를 역임하고 태자소보(太子少保)에 증직(贈職)된 두로 영은공(豆盧永恩公)의 신도비를 말한다. 두로 영은의 본래 성은 모용(慕容)이고 두로은(豆盧恩)으로도 불렸다. 그래서 또 두로은비(豆盧恩碑) · 모용은비(慕容恩碑)로 일컬어지기도 한다.
비문의 저자는 위진 남북조시대의 대표적인 문인이었던 유신庾信이다. 비문은 유신의 문집인 "유자산집(庾子山集)" 에 수록되어 오늘에 전한다. 뿐만 아니라 그때 세운 비석이 지금까지 보존되어 중국 섬서성의 함양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필자는 함양박물관을 방문하여 비석의 보존상태를 살펴본 일이 있다. 비의 상단이 일부 파손된 것을 제외하고는 보존상태는 비교적 양호하였으며 또 많은 부분에서 글자의 판독이 가능하였다.
1500년 전에 세웠던 비석이 오늘까지 이렇게 잘 보존될 수 있었던 것은 두로 영은의 비가 비문과 서법(書法)이 모두 정묘하여 역사상에서 문인과 서법가(書法家)들의 애호를 받아왔던 데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두로 영은은 전연의 개국황제 모용황의 후예이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가 1500년 전 요서에서 활동한 선비족 두로 영은의 신도비문을 주목하는 까닭은 요서에 있었던 고조선국(古朝鮮國)의 실체를 알려주는 결정적인 내용이 이 비문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조선건국(朝鮮建國) 고죽위군(孤竹爲君)”, 이것은 두로공 신도비문(豆盧公神道碑文)에 나오는 명문銘文의 첫 귀절이다. 명문은 비문의 앞부분에서 장황하게 산문체로 서술한 내용을 간단히 축약하는 성격을 지닌다.
요서에 있던 조선국과 고죽국은 모용씨가 세운 연나라의 건국과 통치의 중심이 되었다. 그래서 그것을 “조선건국(朝鮮建國) 고죽위군(孤竹爲君)”이라고 요약한 것이다.
모용선비(慕容鮮卑)의 주요 활동 지역은 진한(秦漢)시대의 요서와 요동, 그리고 하북성 서북 지역까지를 포괄했다. 이 지역은 바로 이른바 고조선이 건국을 했고 고죽국이 통치를 했으며 한무제가 한사군(漢四郡)을 설치했던 곳이다. 그래서 모용선비의 역사를 이야기하면서 “조선건국과 고죽위군”이라는 말을 하게 된 것이다.
두로 영은의 신도비문은 북주 천화(天和) 원년(566) 2월에 각자(刻字)하여 두로 영은의 묘소 앞에 세운 것으로 되어 있다. 시기적으로 볼때 "삼국사기" ·"삼국유사"를 저술한 것보다 이 비문의 저작 연대가 대략 700년가량 앞선다. 그렇다면 김부식과 일연은 과연 이 비문의 존재를 진정 알지 못해서 그들의 저서에서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은 것일까. 혹시 우리가 알 수 없는 다른 어떤 내막이 숨겨져 있는 것은 아닐까.
1500년 전 선비족 두로 영은의 신도비문에 나오는 “조선건국 고죽위군”은 글자는 비록 여덟 자 밖에 안 되는 짧은 문장에 불과하지만 요서에서 고조선이 건국을 하였다는 사실을 그 어떤 자료보다도 확실하게 웅변으로 대변해주고 있다.
요서에서 활동한 선비족 두로 영은의 비문에 나오는 “조선건국 고죽위군”이라는 문구가 일찍이 "삼국사기"·"삼국유사"에 인용이 안 된 것은 천추에 한스러운 일이지만 지금이라도 베일을 벗고 우리 앞에 정체를 드러낸 것은 한국사의 재정립이라는 차원에서 볼 때 한편으론 천만 다행이 아닐 수 없다.
두로 영은의 비문이야 말로 영원히 잃어버린 줄로만 알았던 요서고조선을 21세기에 다시 되찾게 해준 일등공신이다. 상고사는 사료가 생명이라는 사실을 이런데서 실감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겠다.
▲ “잃어버린 상고사 되찾은 고조선” 의 표지 ©브레이크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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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선은 어떤 나라인가?
고조선은 로마·한(漢)왕조보다 위대했던 국가
우리가 잃어버린 상고사 고조선은 어떤 나라인가. 『세종실록』에는 「단군고기檀君古記」를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단군이 나라를 세우고 이름을 조선이라 하였다. 조선 · 시라 · 고례 · 남옥저 · 북옥저 · 동부여 · 북부여 · 예와 맥이 다 단군이 다스리던 나라이다. (檀君立國 號曰朝鮮 朝鮮 尸羅 高禮 南北沃沮 東北夫餘 濊與貊 皆檀君之理)”
여기서 말하는 “단군지리(檀君之理)”라는 이理자는 진리의 ‘이’를 가리킨 것이 아닌 통치(統治)의 치(治)자와 같은 의미로서 조선 · 시라(尸羅) · 고례(高禮) · 남옥저(南沃沮) · 북옥저(北沃沮) · 동부여(東夫餘) · 북부여(北夫餘) · 예(濊)와 맥(貊) 아홉 나라가 다 “단군지치(檀君之治)” 즉 단군이 통치하던 나라라는 뜻이다.
명나라 사람 오명제(吳明濟)가 저술한 『조선세기(朝鮮世紀)』라는 책에는 단군에 대하여 “구이군지(九夷君之)” 즉 “아홉 개 이족들이 모여서 그를 임금으로 삼았다”라고 말하였다. 오명제가 말한 구이(九夷)는 「단군고기」에서 단군조선이 다스렸다고 말한 아홉 개 나라를 지칭한 것이라고 하겠다.
이런 기록들에 따르면 단군은 신화적 인물이 아니라 환국(桓國) · 단국(檀國)시대를 지나 천하를 경영한 고조선왕국의 제왕이었고 단군조선은 변방의 소국小國이 아니라 9개의 제후국을 거느린 대제국이었음이 분명한 사실인 것이다.
영국의 역사학자 토인비는 세계 역사상에서 가장 영향력이 높았던 인물로 로마의 카이사르와 한(漢)왕조의 유방(劉邦)을 꼽았다. 카이사르는 로마 1,000년 왕정의 기틀을 닦았고 유방은 한 왕조 2,000년의 기반을 닦았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로마는 한때 세계를 제패한 위대한 나라였지만 지금 국가도 민족도 남아 있지 않고 오직 역사로서만 존재할 뿐이다. 그러나 고조선은 조선국가와 조선민족과 조선역사가 그대로 살아서 오늘에 면면히 이어지고 있다.
한 왕조는 유방에 의해 건국된 후 한 · 당 · 송 · 명 등을 거치면서 한족 중심의 역사를 2,000년 가까이 이어오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한 왕조 400년 역사에서 서한 말에 왕망王莽의 주권 침탈로 인한 한 차례 망국의 과정이 있었고 그 후 요 · 금 · 원 · 청 등 이민족에 의한 지배도 수백 년에 걸쳐 이루어졌다. 엄격히 말하면 2,000년 역사가 유방의 한족 왕조에 의한 역사라고 단언하기 어렵다.
그러나 고조선은 단군에 의해 건국된 후 내란이나 외침 없이 2,000년 역사를 고스란히 유지하였다. 따라서 카이사르의 로마보다 위대하고 유방의 한 왕조보다 위대한 나라가 우리의 고조선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슈메르가 서양역사의 출발점이라면 고조선은 동양역사의 시원이다. 유럽의 선진국인 독일 · 프랑스 · 영국 · 이태리의 역사는 1,000년을 넘지 않는다. 미국의 역사는 200여년에 불과하다. 우리가 반만년 역사를 자랑하는 세계의 역사 선진국이 될 수 있는 것은 고조선이 있음으로 가능한 것이다.
고구려가 강성했다고 하지만 그 국력이 한나라와 당나라를 초과하지는 못했고 백제와 신라가 문화국가였다고 하지만 그 문화가 중원문화(中原文化)를 능가하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고조선은 달랐다. 경제 · 문화 각 방면에서 중국을 능가하는 선진적인 차원에 도달해 있었다.
우리에게 공자(孔子)가 가서 살고 싶어 했던 군자(君子)의 나라 고조선이 없었다면 우리는 중국 한문화(漢文化)의 아류에 불과하고 우리에게 발해의 모퉁이에 있었던 요서조선(遼西朝鮮)이 없었다면 우리는 한반도에 뿌리를 둔 반도국가에 불과하다.
한국인에게 있어 고조선은 긍지와 자존심의 상징이다. 고조선은 우리민족 건국의 출발점인 동시에 우리 역사상 가장 위대하고 자랑스러운 나라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