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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제 벽골제… 학계에 비상한 관심
고대 토목기술 집약 · 진흙주머니 '초낭' 무더기로 발견
김현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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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5/02/13 [2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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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벽골제 4차 학술발굴조사 지역 조사 후 전경.   /  사진제공 = (재)전북문화재연구원     © 김현종 기자


 


우리나라 최고(最古)최대(最大) 수리시설인 전북 김제 벽골제(사적 제111)1700여년전의 고대 토목기술이 집약된 제방 축조 방식이 밝혀져 학계에 비상한 관심을 끌고 있다.
 
매장문화재 전문조사기관인 ()전북문화재연구원(이사장 최완규)13일 그동안 진행된 발굴조사를 바탕으로 이뤄진 현장설명회에서 "올해 용골마을 지역에서 발굴조사를 벌인 결과, 제방 동쪽 부분에서 보축(補築) 제방 시설을 확인했다" 고 밝혔다.
 
지난 2012년부터 최근까지 4차에 걸친 조사를 통해 "제방의 중간에 위치한 수문인 중심거와 제방의 축조 방식을 파악할 수 있었다" 고 설명했다.


 

▲  보축제방 하층에 진흙을 담아 쌓은 주머니 '초낭' 노출 상태.  / 사진제공 = (재)전북문화재연구원     © 김현종 기자


 
 
특히, "제방 동쪽, 곧 제내부에 해당하는 곳에는 호상(弧狀)으로 보축 제방을 축조하고 있는데 이 보축 제방 성토층(흙을 다진 층) 하단에 초낭(草囊 진흙을 담아 쌓은 주머니)이 열을 맞춰 배치돼 있어 연약지반을 견고하게 하고 있음이 확인됐다" 고 강조했다.
 
이 초낭(草囊)은 일본 카메이 유적(7~8세기) 등지에서 확인된 적이 있지만 우리나라에서 원형이 온전한 형태로 발견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 "초낭(草囊)에 사용된 초본류 주변에서 확인된 것은 볍씨, 복숭아씨, 마름 등이 조사됐으며 이에 대한 방사성 탄소연대 측정 결과를 보면 7세기 전후 통일신라시대에 이들 초낭을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 고 덧붙였다.
 
실제로, "삼국사기를 살펴보면 원성왕 6(790)에 전주 등 7개 주() 사람들에게 벽골제를 증수축하게 했다는 기록과 일치하는 결과가 나왔다" 고 밝혔다.
 
조사결과 또, 제방 기저부의 너비는 약 30cm 내외가 되며 축조방식은 기본적으로 최하단에 부엽층을 두고 점토질과 사질토로 번갈아 성토하고 있는데 사이사이에 토낭과 부엽흔적이 발견됐다.
 
이러한 축조 수법은 "일본 사야마 저수지 제방 등의 원류가 되고 있기도 하다"며 "벽골제는 일각에서 주장하고 있는 해안방파제 역할이 아니라 저수지라는 근거가 더 명확하다"는 논리를 제시했다.
 
또한, 이번 발굴조사는 "1925년 일제에 의해 농수로 개설과정에서 물길을 돌리기 위해 원래의 제방 상부를 훼손하고 만곡 시킨 지점에 대한 조사가 실시됐다"고 설명했다.
 
이곳은 "벽골제 제방의 중앙에서 남쪽에 해당하는 지점으로 내부에서 외부를 흐르는 작은 하천이 잔존하고 있고 낮은 지형으로 인해 일제는 제방을 만곡 시켜 농수로를 개설한 것으로 보인다"고 판단했다.
 
따라서, "제방의 기저부의 파괴는 이뤄지지 않아 그 규모를 확인하는 성과를 거뒀으며 이곳은 지형 특성상 자연적 훼손이 심했을 것으로 통일신라시대에 증개축한 시설이 확인됐다"고 덧붙였다.
 
한편, ()전북문화재연구원(이사장 최완규)13일 벽골제 현장에서 설명회를 개최한 뒤 오후 1시부터 김제시청 대강당에서 "동아시아 고대 농경 수리와 김제 벽골제의 위상" 이라는 주제로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위한 국제학술회의를 개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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