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리카 어느 밀림에는 유난히 효심이 강한 원시부족이 있다고 한다. 그들은 무리에 별 도움도 안 되고 식량만 축내는 노인들을 극진히 봉양한다고 소문이 나있다. 이 종족의 젊은이들은 특히 거동이 불편한 노인들을 잘 대우한다고 한다. 그들의 생태를 조사한 연구팀은 이 '갸륵한 효행' 의 진짜 이유를 듣고는 기겁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원시부족들의 대답은 사자나 하이에나 같은 천적들이 마을을 공격해 올 때 맨 뒤에 처지는 늙은이들 덕분에 종족의 안전이 지켜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말하자면 이 마을의 젊은이들은 맹수의 먹이로 늙은이들을 '사육' 하고 있다는 얘기다. 끔찍한 사례이기는 하지만, 그리고 비록 자발적이지는 않지만 여기서 우리는 다음 세대를 위한 한 세대의 희생을 상징적으로 볼 수 있다. 하기는 부족의 젊은이들 역시 세월이 지났을 때 자신들이 같은 운명에 처해질 것을 알면서도 그 과정에 순응하는 것을 보면 강제적이라고 하기도 어렵다. 다음 세대를 위한 희생은 인간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다. 새끼가 맹수에게 잡혔을 때 목숨 걸고 달려드는 어미의 놀라운 용기는 모든 동물들에게 공통적인 숭고한 본능이다. 능력도 안 되는 딸자식한테 큰 자리를 맡겼다가 '땅콩회항' 을 저질러 세상이 시끄러웠을 때도 그 아버지는 거대한 분노의 파도 앞에 두 팔을 벌리고 나섰다. 그리고 '자식교육 잘못시킨 자신' 에게 비난의 화살을 끌어당기려 애쓰는 모습이었다. 인간의 눈물샘을 자극하는 바로 그 본능이 극장가를 달아오르게 한 영화 '국제시장' 의 인기 배경이기도 하다. "이 힘든 세상을 우리 자식이 아니라 우리 세대가 겪은 게 참 다행이다" 는 주인공의 독백을 들으면서 노년 관객들은 주르륵 뺨에 공감의 눈물을 흘린다. 아버지들의 희생이 어떤 대가를 전제로 한 것은 아니지만 그렇더라도 자식들이 그걸 알아주지 않을 때 섭섭한 것은 인지상정이다. 영화 '국제시장' 을 보고 인터넷에 올린 일부 젊은이들의 글은 앞선 세대에 대한 그들의 평가가 어떤 지를 보여준다. "그래요, 당신들이 고생한 것은 인정합니다, 그렇지만 그 대가로 당신들은 풍요로운 시대의 끝자락이라도 누렸잖아요, 우리는 뭐냐 구요, 일자리가 없어 미래를 포기하고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이런 암울한 세상을 만들어준 것도 당신들 아닙니까" 라고 절규한다. 젊은이들의 영화평은 지금보다 더 암울한 시대를 헤쳐 나온 아버지 세대를 또 한 번 울리지만 그 주장 또한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이런 영화에 관람객이 줄을 잇는다는 것은 우리 사회에 그만큼 울고 싶은 사람들이 많다는 뜻이다. 바로 지금이 앞선 세대와 뒤따르는 세대 모두 울고 싶을 때다. 문제는 세대 간 눈물의 성격이 다르다는 것이다. '고마움을 모른다' 와 '해 준 것이 무어냐' 로 세대가 서로에게 불만이라면 갈등은 필연적일 수 밖에 없다. 세계적인 석학 '레스터 서로우' 는 일찌감치 그의 저서 "자본주의의 미래" 에서 "머지않아 계급투쟁은 부유한 사람들에 대항하는 가난한 사람들의 투쟁이 아니라 노인층에 대한 젊은 층의 투쟁을 의미하게 될 것" 이라고 예언했다. 은퇴한 노인들은 젊은 근로자들의 세 부담을 늘려 노인복지를 확대하라고 요구하고, 젊은 세대는 노년층을 짊어지고 살아야 하는 현실에 거부감을 갖는다. 이미 세대 간 갈등은 이렇게 시작됐다. 문제는 지금이 어른들로부터 지혜를 배우던 농경시대가 아니라는 점이다. 컴퓨터와 스마트 폰은 삶의 중앙에서 올드 세대를 더 멀리 밀어내고 있다. 그래서 갈등해소를 주도해야 하는 아버지 세대는 권위도, 설득력의 질량도 쪼그라들었지만, 그래도 갈등을 해소해야 하는 책임은 여전히 어른들에게 있다. '국제시장' 영화 한 편 보고 아버지 세대가 할 일 다 한 양 어깨 펴고 다닐 일이 아닌 것이다. 후세를 위한 희생은 어차피 본능이기 때문에 선택의 대상도 아니다. 집단으로는 세대갈등이 시작됐지만 그것이 개별 가정 내 세대갈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아버지들에게는 아직도 해야 할 희생이 남아 있다. 종족 보호를 위해 맹수의 먹이가 되는 그날까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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