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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 보존 터, 道 기념물 제130호 지정
7월 24일 지정, 보존 터 중심의 역사문화자원 활용 기대
박은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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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5/07/31 [1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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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진왜란 당시 조선 태조의 어진과 조선왕조실록이 1차로 도착했던 용굴암 터.   / 사진제공 = 정읍시청     © 박은경 기자

 

 

 

임진왜란 당시 조선왕조실록과 조선 태조 어진이 지켜졌던 ‘정읍 내장산 조선왕조실록 보존 터’가 지난 7월 24일, 전라북도 기념물(문화재) 제130호로 지정됐다.

 

전북도의 이번 道 기념물 추가 지정은 정읍시가 지난 2010년 9월부터 12월까지 4개월 동안 진행된 전국향토자원조사팀(팀장 이용찬)이 11월 현장을 발견 한 후, 2011년부터 정읍시가 전북대학교 박물관에 발굴조사 및 문헌조사와 지표 조사를 거쳐 전라문화유산원과 함께 전라북도 기념물로 등재를 추진한지 5년여 만의 성과다.

 

조선왕조실록은 임진왜란 당시 정읍선비 안의와 손홍록이 중심이 되어 당시까지 전주사고(경기전)에 보관돼 있던 고려사일부의 서적들과 조선왕조실록, 태조 어진 등을 내장산으로 옮겨와 당시의 영은사 주지 희묵대사를 비롯한 승병들과 용굴암, 은적암, 비래암 등을 거치며 380여 일을 수직하다 왕명에 의해 아산으로 옮겨 1차 전란을 피했다.

 

임계기사(壬癸記史)에 따르면 이후 실록은 1593년 계사년 7월 9일 정읍 내장산을 출발, 정읍현 객사로 옮겨진 후 태인(7/11)→이성(폐현, 7/12)→익산(7/13)→용안(7/14)→임천(7/15)→은산(부여7/16)→정산(청양7/17)→온양(7/18)→아산(7/19)→수원(가소을 오지리7/20)→남양(다발리 7/21)→인천(비도 오이리7/22)→부평(7/23)→7월 24일 강화부 도착했다.

 

 

▲  정읍의 선비 안의가 기록한 임계기사에서 임진년 9월 28일 내장산의 가장 험절한 암자, 비래암(飛來庵)에 조선왕조실록을 보존 했다고 기록한 비 .   / 사진 = 이용찬 기자

 

 

 

정유년 발발 정유재란으로 당시까지 남아 있던 전주사고 또한 왜군들의 방화로 잿더미가 되었지만 경기전과 전주사고에 보관돼있던 태조의 어진과 실록은 정읍 선비들에 의해 화마를 피할 수 있었다.

 

하지만 추위를 지켜보며 사태를 관망하던 안의와 손홍록은 다시 정유재란이 발발되자 선조 30년(1597년), 1월에 다시 한걸음에 아산에 도착했다.

 

당시 이들의 행보는 1차 피난에 이어 북한 묘향산 보현사로의 2차 피난을 주도하기 위해서였다. 두 선비는 내장산에서처럼 윤번으로 다시 수직을 시작하며 묘향산 보현사로 옮기기 위한 준비에 나섰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내장산에서의 야전 생활과 내장산부터 아산까지 이어졌던 1차의 긴 피난 여정의 풍찬노숙으로, 중병이 들어 있던 안의는 고향인 태인(현재의 정읍시 옹동면 비봉리)으로 낙향, 절명하고 말았다.

 

조선왕조실록의 1차 피난을 주도했던 정읍의 선비 안의는 경기전의 전주사고가 건립되기 이전인 1464년 처음 조선왕조실록을 처음 전주에 옮겼던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 작자이기도 했던 인순부윤(仁順府尹)안지(安止,1377년~1464)의 후손으로, 안의는 그런 선조의 노력이 헛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조선왕조실록의 1차 피난을 주도했던 인물이다.

 

당시까지 조선왕조는 서울 춘추관과 충주, 성주 전주 등 4곳에 사고를 설치, 실록과 어진을 보관했다. 하지만 임진왜란 당시 전주사고를 제외한 3개 사고가 불탔으며, 정유재란에는 남은 전주사고 마저 불타 소실됐다. 하지만 전주사고 남아있던 실록은 전란이 한창이던 1592년 6월 22일 정읍선비들이 내장산으로 태조 어진과 실록을 옮겨, 1차 전란을 피했던 것이다.

 

정유재란 당시 강화부에서 시작된 조선왕조실록의 2차 피난 과정은 정읍의 선비 손홍록의 주도로 뱃길로 백령도 옮겨졌다가 다시 청천강을 거슬러 올라가 안주에서 따로 보관돼 있던 태조 어진과 다시 재회한 후 영변으로 들어가 실록과 어용을 묘향산 별전에 봉안, 2차로 전란을 피했다.

 

전란이후 실록은 모두 4부를 추가 인쇄한 후 오대산과 태백산, 정족산, 적상산사고 등에 보관했다.

 

김생기 정읍시장은 "‘내장산 조선왕조실록 보존 터’는 임진왜란 당시 서울 춘추관과 충주, 성주 사고가 불타 전주사고(全州史庫)에 유일본으로 남아 있던 조선왕조실록을 정읍 선비들이 내장산으로 옮겨 보존함으로써 세계사적으로도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장구한 역사를 기록한 역사서를 지켜냄으로써 오늘날 세계기록문화유산으로 등재될 수 있었던 역사적인 장소"라고 밝혔다.

 

덧붙여 "앞으로 내장산에 산재한 실록과 태조 어진의 보존 터는 지역의 소중한 역사·문화자원으로의 활성화를 추진해 정읍이 조선왕조실록 지킴이의 실질적인 고장이라는 지역적 자긍심을 높이고, 보존 터 또한 정읍의 중요한 역사·문화관광 자원으로 만들어 나가겠다"고 말했다.

 

한편, 이번 실록 보존 터의 문화재 지정과 관련, 시민들은 "세계기록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조선왕조실록과 태조 어진이 우리 정읍 선비들에 의해 내장산에서 보존되었다는 역사적 사실에 더욱 자긍심을 갖게 됐다"며 "앞으로도 보존 터를 역사문화자원으로 활용해 실록 지킴이의 고장으로서 자부심을 높여 나가야 할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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