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f 환란의 고비를 넘겼다고는 하나 계속되는 경기 부진으로 서민 살림살이가 어렵다.
특히 올해는 ‘이상 기온’으로 “여름 장마가 울고 갈 정도로 가을 장마와 태풍까지 기승을 부려 추석 명절 분위기마저 실종된 것 같아 씁쓸하기만 하다.
그러나 계절은 다시 어김없이 가을을 향해 달려간다.
청량한 산들바람은 누렇게 익어가는 들판을 물결치게 만들며 또 빨갛게 영글어 가는 과일의 속살까지 어루만진다.
가을의 풍광은 이처럼 보기만 해도 만복감이 충만하고 상쾌한 청량함이 폐부 깊숙이 저민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늘 한가위 같아라”라는 옛 말도 있듯이 농사꾼은 땀흘린 보람과 추수에 대한 기대로 가득한 것이 일년 중 바로 이 때다.
그래서 ‘오월 농부, 팔월 신선’이라 하지 않았던가.
농경민족은 가을 수확기에 축제를 열었다.
본격적인 추수 전에 풍만한 달이 뜬 음력 8월 보름날을 잡아 잠깐 일손을 멈추고 첫 물로 거둔 햇곡식으로 신도주를 담는 한편 메를 짓고 송편을 빚어 햇과일과 함께 천신제(薦新祭)인 추석을 지냈다.
추석은 결국 신을 먼저 경배한 후에 인간을 배려하는 우리 민족의 겸허함이 밴 명절이다.
가을걷이를 끝내고 세속사를 일단 챙긴 뒤 10월을 넘겨 신께 감사드리는 축제를 지낸 서양과 대비된다.
민간 전래의 풍속인 추석이 궁중으로 들어간 유래는 삼국사기 유리니사금조(儒理尼師今條)에 나온다.
왕녀가 두 패로 나눈 육부(六部)의 여자를 거느리고 칠월 열엿새부터 매일 밤 늦도록 길쌈을 하고 팔월 보름날에 그것을 모아서 승부를 결정지었다.
진 편에서는 술과 음식을 마련해 이긴 편에 대접하고 노래와 춤은 물론 온갖 놀이를 했다.
이 때 “회소 회소”하고 탄식한 구절이 애처롭지만 우아해 회소곡(會蘇曲)이란 노래가 됐다.
이를 가배(嘉俳)라고 했는데 음운 변화를 일으켜 ‘가위’로 됐고 다시 크다는 뜻을 지닌 앞가지 ‘한’이 붙어 ‘한가위’로 불리게 된 것이다.
또 가을 달이 뜨는 저녁(月夕) 경관이 인상적이었기 때문에 추석(秋夕)이란 이름도 생겼다.
오죽했으면 점잖은 한학자까지 중추가절(仲秋佳節)이라며 극찬한 날이 바로 추석이다.
고려 속요 동동(動動)에는 “팔월 보름은 / 아으 가배날이 마른 / 님을 뫼셔 녀곤 / 오늘날 가배샷다 / 아으 동동다리”란 구절이 있다.
이처럼 신라와 고려 시대까지 추석은 여자 세상이었다.
농사의 신께 제사를 지내던 이 날이 조선 시대로 접어들며 효(孝)가 강조되면서 조상께도 차례를 지내게 됐다.
따라서 부인네는 당시의 가부장적 사회에서 남정네의 뒷바라지를 주로 하게 됐다.
현대 주부들이 ‘명절 증후군’을 앓는 것은 이 같은 유습에서 비롯된 같다.
추석에는 ‘민족 대이동’이 벌어진다.
교통 지옥을 감내하며 모두가 귀향길에 나선다.
조상께 차례를 지내고 자식을 기다리는 부모를 만나기 위해서다.
선물로 비록 술 한 병과 내의 한 벌밖에 준비하지 못했어도 맘은 설렌다.
그리고 타관 생활이 고생스러워도 부모 앞에서는 내색하지 않고 당당하게 보이려 애쓴다.
반가운 친척과 그리운 친구를 만나 안부를 묻고 떠들다 보면 다시 기가 살아나는 것이 바로 고향의 힘이다.
추석 아침 나절, 햅쌀로 빚은 술과 송편에 박나물을 비롯한 온갖 나물에다 전을 곁들이고 감 대추 밤 등을 정성껏 차려 조상께 차례를 지내면 차분하고 엄숙한 분위기가 감돈다.
그러나 성묘까지 끝내고 음복술의 주기가 오르면서 풍물패 꽹과리 소리가 요란하면 제의적 분위기는 축제로 바뀌어 명절의 열기가 더해진다.
추석은 더불어 즐기는 명절이다.
그러나 우리 곁에는 명절이 더욱 쓸쓸한 이웃이 많다.
홀로 사는 노인을 비롯해 외로운 눈동자로 사랑을 갈망하는 보육원생에 이르기까지 소외 계층의 아픔은 너무나 애절하다.
이들에게 따뜻한 온정의 손길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최근엔 우리가 꺼리는 힘든 노동을 대신하기 위해 수많은 외국인 노동자까지 있다.
그들을 따뜻하게 배려하는 것도 세계화 시대 성숙된 국민의 도리가 아닐까 싶다.
추석은 농민의 명절이었다.
비록 세상이 변했다지만 그 미풍양속은 긍정적으로 계승돼야 한다고 본다.
/ khjpre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