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남 나주시청 '정렬사' 관리사무소 이상구씨가 전북대학교 김익두 교수에게 제공한 "건재 김천일 의병장 초상화". © 이용찬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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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건재 김천일이 스승 일재 이항이 임진왜란을 16년 앞둔 1576년 타계하자 벼슬을 버리고 달려가 옛 강습 터에 신축했던 '남고서원(정읍시 북면 보람리)' 전경. © 이용찬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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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대학교 김익두 교수와 허정주 박사가 1981년 언양 김씨 대종회가 발간한 "건재선생문집"을 모델로 한 번역본Ⅰ과 조선왕조실록 '김천일 관련 기사 수록본'을 Ⅱ집으로 엮은 "건재 김천일 전집 Ⅰ~Ⅱ"를 발간했다.
김익두 교수가 건재(健齋) 김천일(金千鎰‧1537~1593) 관련, 추가자료 수집과 현지조사 과정을 3년여 만인 최근에 발간한 "건재 김천일 전집"은 1833년 언양 김씨 대종회 김민상 등이 처음 편집‧간행한 본집 4권과 부록 7권 등 목판 활자본 11권이 원본이다.
1981년 당시 김 교수의 집안 외척인 정운한 옹이 번역한 국역본을 참고 자료로 삼아 재 발간됐다.
Ⅱ집에는 선조실록 및 '선조수정실록‧광해군일기‧인조실록‧효종실록‧현종실록‧현종개수실록‧숙종실록‧영조실록‧정조실록‧순조실록'등의 "조선왕조실록"안에 명시된 건재 김천일의 120여 회의 관련 기사와 전북대 김익두 교수가 전국 각지를 누비며 촬영한 사진 자료가 본문과 함께 게재돼 있다.
건재 김천일은 선조가 창의사(倡義使)라는 별호를 내려 칭송했을 만큼, 호남의 최초의 의병장이자 임진왜란 당시의 전국의 전쟁에 선봉에 섰던 불굴의 맹장이었다.
김천일은 당시 호남 유학의 비조(鼻祖)이던 정읍의 일재(一齋) 이항(李恒‧1499~1576)의 수제자로 스승 일재의 유지를 받들어 전란 이전부터 임진왜란을 대비했다.
또, 전집 Ⅰ에 소개된 스승 일재와 건재 김천일의 인연은 건재의 나이 19세가 되던 1555년부터 시작된다.
당시 그의 외조모는 "가까운 데에도 네 스승이 얼마든지 있는데 어찌하여 멀리만 가려 하느냐"며 막아섰지만, 건재는 "경사(經師)는 만나기 쉬우나 인사(人師)는 만나기 어렵기에 가까운 데를 버리고 멀리가려 합니다"며 외조모의 손을 뿌리쳤다고 한다.
건재 김천일이 스승 일재의 곁을 떠나 있던 1557년 21세의 건재가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1510~1560)를 만났는데, 하서가 건재의 배운 바를 질문하고 말하기를 "사물의 실제 이치를 터득한 선비를 남쪽 고을에서 보기는 이 사람이 처음이다"며 오언절구와 칠언절구 두 수의 시를 지어 주었을 만큼, 학문에도 뛰어났다.
이해 건재는 생원초시에 처음 합격하고 벼슬길에 나아가게 되었는데 미암(眉庵) 유희춘(柳希春‧1513∼1577)은 그의 합격을 2수의 칠언절구로 지어 축하하기도 했다.
이렇듯, 건재 김천일은 하서와 미암을 비롯 율곡(栗谷) 이이(李珥)‧사암(思庵) 박순(朴淳)‧송강(松江) 정철(鄭澈)‧우계(牛溪) 성혼(成渾)‧제봉(霽峰) 고경명(高敬命) 등의 총애 속에 당대 서인(西人)들의 중심인물로 활동했다.
건재는 군기시주부(軍器寺主簿)를 거쳐 용안현감(龍安縣監)‧강원도사(江原都事)‧경상도사(慶尙都事)‧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임실현감(任實縣監)‧순창군수(淳昌郡守)‧담양부사(潭陽府使)‧한성부서윤(漢城府庶尹)‧수원부사(水原府使) 등을 역임한 이후 고향으로 돌아가 닥쳐올 왜란에 철저히 대비했으며 의병을 일으켜 전장의 최선봉에 섰다.
임진왜란이 발생하자 건재는 의병을 모아 곧 바로 서울로 북상, 수원 독성산성 전투를 거쳐 금령전투를 치르고 강화도로 들어가 전력을 정비했다.
의주(義州)로 피난 한 선조의 명을 신하와 백성들에게 전달하고 왜적에게 사역한 서울 도성과 경기의 백성들을 개유하여 마음을 돌리게 하고 왕릉의 도굴을 막았다.
이후 한강 일대 양화도 등지의 선유봉 전투‧노량전투‧사현전투 등을 승리로 이끌며 명나라 원군 이여송의 군대와 연계해 서울을 탈환하는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서울이 수복되자 그동안의 전투에서 살아남은 남은 군사 300명을 이끌고 다시 남하해 곧바로 진주성으로 들어가 최경회‧황 진‧양산숙 등과 함께 9일 동안 진주성을 지켰다.
하지만, 진주성 2차 전투에서 중과부적(衆寡不敵)으로 여러 전우 및 맏아들 상건 등과 함께 순절함으로써 왜적의 전투력을 크게 약화시켜 조선의 곡창 호남을 보호하는 데 성공했다.
이로 인해, 이후 이순신 장군의 정유재란 전투까지 군량미 조달이 가능케 했다.
이 같은 건재 김천일의 공로는 조선왕조 말기까지 "조선왕조실록"에서 무려 120여 차례 이상 언급됐으며 사후 영의정(領議政)에 추증됐다.
현재 그를 배향하는 사우(祠宇)는 나주 정렬사(旌烈祠)‧진주 창렬사(彰烈祠)‧정읍 남고서원(南皐書院)‧순창 화산서원(花山書院)‧임실 학정서원(鶴亭書院) 등이 있다.
건재 김천일은 의병활동 뿐만 아니라 자신을 평생 동안 극심한 한병(寒病)으로 시달리게 했을 정도의 지극한 효성 및 벼슬을 버리고 돌아가 서거한 스승을 극진히 영결했으며 사당(祠堂)과 서원(書院)을 지었던 제자의 의로운 도리와 애국충절 등 조선시대의 사표가 되지 않은 것이 없었다.
김천일의 스승 일재 이항은 생전에 임진왜란에 대비해 제자들로 하여금 문무를 겸하게 해 밖에서는 왜구에 항전하게 하고 안에서는 "조선왕조실록"과 조선 태조 이성계의 어진을 지켜내게 했던 호남의 거유(巨儒)였다.
한편, 전북대 김익두 교수는 "그동안 건재 김천일과 그의 스승 일재 이항에 대한 역사는 호남의 역사에서 뿐만 아니라 지역의 역사적인 평가에서 조차 제대로 이뤄지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라며 "건재와 그의 스승 일재 선생의 위대했던 행적이 살아 있는 지역적 자긍심으로 거듭나기를 희망한다"는 소감을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