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립현대미술관이 미술은행 소장품으로 내가 생각하는 나의 자화상과 일종의 자화상이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기획전을 오는 9월 16일까지 정읍시립미술관에서 전시한다. (사진 상단 왼쪽부터 ▲ 변웅필 = 한사람으로서의 자화상 ▲ 이소연 = 새장 ▲ 최민화 = 하얀기타 작품) © 이용찬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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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울과 사물에 비춰지는 작가들의 얼굴은 여러 조각으로 나뉜 일그러진 사물의 모습이거나 자신이 아닌 자신을 닮은 또 다른 내 과거의 모습이 일종의 자화상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작업실에 갇혀 있는 작가의 눈에 비춰지는 자신의 자화상은 분홍빛 언덕 위에서 기타를 연주하는 모습이거나 불현 듯 떠오르는 아픔의 장소가 되기도 한다.
그래서 작가들의 자화상은 사물에 비춰지는 자신들의 모습은 작자들 내면 저 깊은 곳의 염원이 캠퍼스 위에 드러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15세기, 서구 유럽의 미술품 수집가들은 상상을 초월하는 작가들의 작품에 열광하면서도 구상과 비구상의 화려한 작품들을 완성하는 작가들의 심연을 들여다보기 위해 그들만의 일종의 자화상을 그리게 하고 그것을 수집하고자 했다.
하지만, 작가들의 기억이 투영된 작품들은 좀처럼 미술시장에 나오지 않았고 대부분 작가들의 사후에야 비로소 작가들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기회가 주어져 왔다.
그러나 근대기 마르셀 뒤샹 (Marcel Duchamp)의 샘이 변기로 둔갑된 이후 작가들의 심연은 더 이상 감추어진 것이 아니라 거꾸로 드러내는 것이 되었는지 모른다.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포스트콜로니얼 시대를 지나며 이제 작가들의 자화상은 더 이상 작품 뒤에 숨겨진 그들만의 숨은 심연이 아니었다.
적극적으로 자신의 바람과 욕구‧고민‧우울‧상처 등 이전까지는 드러낼 수 없던 내면의 외침을 거침없이 캠퍼스의 주제로 담아냈고 그들의 무언의 외침은 기획전을 통해서 커다란 외침으로 다가온바 있다.
따라서 이미 캠퍼스의 주제로 등장하기 시작한 작가들의 자화상 속 모습은 그래서 일정한 형식을 거부하고 나와 관객이 공통분모를 찾을 수 있게 하는 일종의 자화상으로 자리매김 되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관객들에게 비춰지는 커다란 바위와 민둥산은 작가들의 심연을 이해하기보다 자신과는 동떨어진 또 다른 심연을 확인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작가들의 일종의 자화상과 관객들의 현실적인 자화상이 공감대를 형성하게 되는 작품들은 대부분 선명한 구상작품들 가운데에서 찾을 수 있다.
이것은 불현 듯 또 다른 나를 찾아보는 계기가 되기도 하지만 실체를 가늠할 수 없는 비구상 작품들 속에서는 오히려 또 다른 일종의 자화상에 끝없는 의문과 매력에 빠지게 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한편, 내가 생각하는 나의 자화상과 일종의 자화상이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기획전이 오는 9월 16일까지 국립현대미술관이 미술은행 소장품을 정읍시립미술관에서 감상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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