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달 30일 한국프레스센터 기자회견장에서 한국민족운동사학회의 '보천교와 보천교인의 민족운동' 학술대회가 진행되고 있다. © 이용찬 기자 |
|
▲ 학술대회 이후 발표자와 토론자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 이용찬 기자 |
|
암울했던 경술국치 이후, 허무한 봉건시대의 종말과 함께 우리땅에서 일본 제국주의의 폭압적인 통치가 시작되었다.
대한제국의 모든 국민들은 어둡게 드리워진 회색빛 하늘을 올려다볼 뿐 나아갈 방향을 찾지 못했고이전의 세도가들은 발 빠른 친일에 나서며 다시금 자신들의 뱃속 채우기에 바빴다.
한없이 무능했던 봉건시대의 조선을 바라보아야 했던 우리의 선각자들은 민족의 결속을 위해 새로운 이념의 민족적 통합에 골몰하기 시작했고 이전의 차별 없는 세상을 외치던 동학농민혁명의 시천주와 사인여천‧인내천 사상 등이 우리민족 고유의 민족사상이었다는 것을 밝히는 대종교를 출범시키기도 했다.
하지만, 정적인 민족사상에만 안주하지 않고 일제의 국내 침탈이 노골화되던 1900년 초부터 일제에 대한 새로운 저항에 나서고자 했던 또 다른 선각자들과 이해 7월, 기존의 동학당 교권을 장악한 3대 교주 손병희마저 온건주의 형태로 교단을 이끌게 되자 피 흘려 신분 차별의 세상을 타파했던 동학 참여자들은 새로운 돌파구를 찾아 나서야만 했다.
이러한 시대 흐름 속에서 교권을 장악한 손병희가 서둘러 서양 문명을 학습하기 위해 일본으로 떠났던 1901년 8월 18일증산 강일순은 천지대도를 터득하고 새로운 후천선경 세상을 여는 '혜원상생'의 시대를 선언했다.
당시 증산의 사상은 "약육강식, 우승열패의 세상을 넘어 인류가 서로 사랑하며 돕는 화해를 통해 상생(相生)의 세상을 만들자"는 것이었다.
따라서 증산은 전봉준의 혁명을 지지하면서도 화해와 상생을 외치며 국내 침탈에 나서는 일본에 대해서는 철저한 반일적 입장을 취하고 있어 수많은 민중의 지지를 이끌어냈다.
일제강점기의 시작과 함께 새로운 민족운동 세력으로 떠올라 파란만장했던 시기를 보내고 1930년대 중반 허무하게 종말을 맞았던 정읍에 본소를 두고 있던 민족종교 보천교에 대한 학술적 조명이 지난달 30일서울 한국프레스센터 19층 기자회견장에서 열렸다.
이날 학술대회는 "보천교와 보천교인의 민족운동"이라는 주제로 한국민족운동사학회가 주최하고 전북도와 정읍시가 후원했으며 2016년 전북도청 회의실에서 종교학자와 철학계‧미족학회가 공동으로 개최했던 보천교관련 학술대회에 이어 두 번째로 마련된 자리로 한국민족운동사학회 주관으로는 첫 번째 학술대회로 개최됐다.
한성대 조규태 교수를 비롯 8명의 발표자와 10명의 토론자가 과연 보천교의 민족운동이 일부 친일 흔적으로 보이는 1925년의 시국대동단과 보천교 분파 종교들에 대한 보천교 관련성 여부를 묻는 열띤 발표와 토론 등의 순으로 진행됐다.
이 자리에서 한성대 조규태 교수는 '보천교의 성립과 그 민족운동사적 의미'라는 주제로 기존의 기독교‧천도교 등의 종교계 민족운동사에 가려 조명되지 못했던 보천교 민족운동을 과정을 밝혔다.
특히 지난 30여년 동안 정읍 지역에서 일어났던 보천교의 민족운동사에 대한 쉼 없는 연구를 지속해 왔던 안후상(고창북고) 교사는 1920년대 보천교의 '권총단 사건'을 통해 군자금을 제공한 사실들의 역사적 근거를 밝히며 보천교의 민족운동에 대한 새로운 조명을 주문하기도 했다.
이어 정읍역사문화연구소 김재영 이사장이 '후천개벽운동과 보천교'‧수원대 박환 교수의 '1920년대 만주지역 독립운동단체의 군자금 모금과 보천교 –김좌진과 보천교' 등의 발표를 통해 조선총독부가 유사종교로 몰아 민중을 기만하는 종교단체로 인식되게 했던 보천교와 대종교 등을 재조명하며 향후 객관적 추가 연구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한편, 김정인(춘천대) 교수는 "1930년대 조선총독부의 탄압과 보천교의 강제 해산"이라는 주제 발표를 통해 1920년대 활발한 종교활동과 민족운동을 전개했던 보천교를 조선총독부가 강제적으로 해산하는 과정과 이유에 대해 심도 있게 발표해 토론자들의 질문이 집중적으로 이뤄지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