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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암 이삼만' 선양사업 활성화… 학술대회(상)
정읍학연구회ㆍ(사)민족문화연구소ㆍ전북대 농악 풍물굿연구소 주관
이용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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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22/06/20 [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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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남이 낳은 조선의 3대 명필 창암(蒼巖) 이삼만(李三晩 = 1770~1847) 선생에 관련된 연구 및 선양사업 활성화를 위한 학술대회가 '정읍학연구' 주최로 지난 18일 전북대 사범대 본관 3층 멀티미디어센터에서 열려 학계에 비상한 관심이 모아졌다.    (학술대회 주요 참석자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 사진 = 이용찬 기자     © 이용찬 기자



호남이 낳은 조선의 3대 명필 창암(蒼巖) 이삼만(李三晩 = 1770~1847) 선생에 관련된 연구 및 선양사업 활성화를 위한 학술대회가 '정읍학연구' 주최로 지난 18일 전북대 사범대 본관 3층 멀티미디어센터에서 열려 학계에 비상한 관심이 모아졌다.

 

이날 학술대회는 창암 이삼만 서예연구의 동향과 선양의 현주소 창암 이삼만 '정읍 출생설' 논증 창암 이삼만 선생의 서도사적 의의와 가치 창암 이삼만 선생 선양사업의 방향주요 콘텐츠 추진방법 종합토론 순으로 진행됐다.

 

본지는 선각자들의 노력이나 학계의 매우 어려운 연구가 이어진다 하더라도 정치권 및 지자체 일선 행정공무원들의 무지(無智)가 이 같은 노력을 종종 한낱 가치 없는 것으로 만들어 버렸거나가치 없는 것이라고 판단하는 무시로 타 지자체 또는 시도에 비해 전라북도 문화유산이 평가 절하되는 사례가 반복되지 않기를 소망하는 마음을 담아 학술대회를 3회에 걸쳐 게재한다.

 

새로운 시대를 위해서는 새로운 정치인(政治人)뿐만 아니라 일부 행정공무원이 과거 탐관(貪官)과 같은 자세가 아니라 이 시대에 걸맞은 새로운 공무원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는 가운데 조선의 3대 명필 창암(蒼巖) 이삼만(李三晩) 선생에 관련된 연구 및 선양사업 활성화를 위한 학술대회가 공무원들에게 마지막으로 울리는 경종(警鐘)이 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편집자주

 

 

▲  호남이 낳은 조선의 3대 명필 창암(蒼巖) 이삼만(李三晩 = 1770~1847) 선생에 관련된 연구 및 선양사업 활성화를 위한 학술대회가 ▲ 창암 이삼만 서예연구의 동향과 선양의 현주소 ▲ 창암 이삼만 '정읍 출생설' 논증 ▲ 창암 이삼만 선생의 서도사적 의의와 가치 ▲ 창암 이삼만 선생 선양사업의 방향ㆍ주요 콘텐츠 추진방법 ▲ 종합토론 순으로 진행되고 있다.                                                                                                                                                  © 이용찬 기자


 

 

정읍학연구회 주최로 ()민족문화연구소와 전북대 농악 풍물굿연구소가 공동으로 주관한 이번 학술대회 첫 서막은 원광대학교 배옥영 전 교수와 전북대학교 김익두 교수의 발제로 포문을 열었다.

 

먼저, 배 교수는 현재까지 진행된 창암(蒼巖) 이삼만(李三晩) 선생의 서예연구 성과와 동향 지지부진한 선양사업의 난국 등의 문제를 들춰냈다.

 

배 교수는 이 자리에서 "현재까지 선양사업단체는 지난 2001년 발족한 전주 권갑석 회장을 비롯 서예인과 언론인 등 150여명이 '() 창암 이삼만선생 기념사업회'를 처음 발족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김영구이 정 등의 서예인을 중심으로 '창암 이삼만 선양회'가 발족했고 창암 서예 공모전을 개최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정읍에서는 2002년 정읍 미술협회와 조인숙 대표를 중심으로 비영리단체인 '창암 이삼만 선생 서예술문화진흥회'가 발족, 전북대학교와 컨소시엄을 통해 1년여의 조사와 연구를 진행했고 2005'창암 이삼만 선생 유묵 첩'을 출간하기도 했다"고 소개했다.

 

그러면서 "현재까지 창암 이삼만의 선양사업이 진행돼 관련 저서 8박사학위 논문 2석사학위 논문 5일반 논문 34편 등 총 49편의 연구 성과가 있었지만, 현재 선양사업을 진행하고 있는 완주전주정읍지역 단체 간의 협력은 이뤄지지 못하면서 뚜렷한 성과를 내놓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전북대 김익두 교수는 "창암 이삼만 선생의 정읍 출생설을 가장 가깝게 뒷받침하는 근거로 현재까지 발견된 가장 오래된 서첩으로 전주 솔화랑 서정만 대표가 소장하고 있는 창암의 38세 때 쓴 서첩을 근거"로 제시해 이목을 집중시켰다.

 

특히 "창암의 서첩 맨 아래의 마지막 수결(手決)'정묘 416, 기초(箕樵)가 서원에서 쓰다. 창암'으로 되어있다""이를 근거로 살펴보면, 현재 서원(西原)을 어디라고 특정할 수 없지만 '내장산 서래봉(西來峯) 인근 언덕'으로 추정된다"고 제시했다.

 

또한 "창암의 유필(遺筆)이 각자 되어있는 부무실(富武室) 석담(石潭)'창암 이삼만 출생지'라는 글귀처럼 부무실이 내장산 서래봉 인근 마을이고 서래봉이 마주 보이는 마을이라는 것"을 사례로 들었다.

 

아울러 "서첩에서 창암은 자신을 기초(箕樵)라고 표기했는데 이것은 곧 자신을 중국 소부(巢父)에 허유(許由)가 살던 기산(箕山과 같은 깊은 산중에 사는 초부(樵夫 = 나무꾼)로 비유한 것"이라며 "이런 점에서 창암이 서첩을 쓸 당시에는 번화한 전주가 아닌 깊은 산중인 현재의 정읍시 부전동 부무실에서 '나무꾼'과 같은 삶을 살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밝혔다.

 

"1957년에 발간된 '신편 정읍군지'를 살펴보면 창암 이삼만은 158년 전인 영조 경인(庚寅) 928일 전주인 지철의 2남으로 정읍 현 동면 부무실 극빈한 가정에 태어났다. 창암의 선친은 명패(名牌)만 중인(中人)이다. 체구(體軀) 그대로의 강직한 성품의 지철은 가혹한 제도에 대한 항거를 은둔(隱遁)에서 찾으려고 전라감영 전주를 하직하고 산간벽촌 이곳에 옮아온 것이다"라는 기록을 소개했다.

 

이어 "일부에서 '전주인'이라는 내용으로 창암이 전주사람이라는 주장을 하고 있지만, 그것은 '전주이씨'라는 것을 의미할 뿐 창암이 50세 이전에 전주에서 쓴 서첩이나 자료는 현재까지 그 어디에서도 나타나고 있지 않다""창암이 등졌던 전주를 다시 찾았던 시기는 50대 이후인 1830년대로 교동의 한벽당 뒤쪽 최병심(1874~1957) 집안의 서당 인근에 창암이 쓴 석각 글씨들이 다수 남게 된 것"이라고 강조했다.

 

하지만 "전주에서는 그 어떤 이유에서인지 이곳을 '창암의 출생지'라는 안내판을 내걸고 있다""전주에서 창암을 소개한 '전주시사(1967)'에 따르면, 창암은 이조 영조 46(1770) 928일에 정읍군 내장면 부전리 정읍 현 동서쪽 부무실에서 출생했다는 기록이 있다"고 덧붙였다.

 

이 밖에도 "창암에 관련된 또 다른 기록인 '전주야사(1967)'에는 부채장수와 창암의 대화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잠든 부채장수의 빈 부채에 여러 글귀를 적어 넣은 창암은 부채 장수에게 '부채란 미미하면 사람의 눈을 끌 수 없는 법'이라며 '글귀가 들어간 부채를 들고 성내를 돌아보라 이르고 못 믿겠으면 대숲 집 월당 최담공 선생 댁 사숙에 머무는 사람'이라는 대화처럼 한벽루 인근은 잠시 머물렀던 사숙(私塾)이었다"고 주장했다.

 

"일각에서 전주 출생설을 주장하는 근거로 일제강점기 말기인 1943년에 발간된 전주부사에 '영조 46년 경인(庚寅 = 1770) 928일 전주에서 태어나 철종 13(丁未) 212일 전주에서 사망, 향년 78'라는 기록이 있지만, 이 기록을 부연하듯 1967년에 발간된 '전주시사'에서는 창암의 출생지를 분명하게 정읍으로 못 박고 있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전주야사에 창암은 이조 영조 46(1770) 928일 날, 전주인 지철(衼喆)의 아들로 이름을 규환(奎奐)이라 하고 완산 부성 부등으로 비낀 자만동 도량(周邊)에서 출생했다고 기록돼 있다""일설에는 정읍 태생으로 말하고 있으나 그 가문에 물어 봤더니 '완산 부성 태생으로 밝히는 소식으로 받아들임이 타당한 줄로 안다'는 내용으로 전주 출생설을 주장하고 있다"고 반박했다.

 

이어 "명확한 전주 출생설에 대한 근거로 '그 가문에 물으니 완산 부성 태생이란 소식'을 들고 있으나 창암의 족보와 가계를 조사해 보아도 창암의 출생지가 전주라는 말 대신 부무실로 표기하고 있어 전주 출생설의 구체적인 근거가 없다"고 구체적으로 언급했다.

 

끝으로 "이런 점에서 창암의 출생설은 현재 정읍과 전주의 두 학설이 있으나 여러 논거를 종합적으로 살펴보면 전주이씨 완파 가문 출신이기는 하지만 부친이 현재 정읍시 부전동 부무실 마을로 이주해 이곳에서 태어났던 것이 명확하다""50대 초반 전주로 이거해 60대 후반까지 주로 전주 옥류동/자만동인 현재의 전주 교동에서 서도에 정진했고 60대 후반부터는 완주군 상관면 죽림리 공기 골 마을로 들어가 살았다"고 밝혔다.

 

아래는 위 기사를 구글 번역이 번역한 영문 기사의 '전문' 입니다.

구글 번역은 이해도를 높이기 위해 노력하고 있으며 영문 번역에 오류가 있음을 전제로 합니다.

Below is the 'full text' of the English article translated by Google Translate.

Google Translate is working hard to improve understanding, and assumes that there are errors in the English translation.

 

Activation of 'Changam Lee Sam-man' Shenyang businessAcademic conference (award)

Hosted by Jeongeup Studies Research Group, National Culture Research Institute, and Nongak Pungmul Gut Research Center at Chonbuk National University

 

Reporter Yong-chan Lee

 

On the 18th, Chonbuk National University Main Building 3, hosted by 'Jeongeup Study', an academic conference for research related to Lee Sam-man (李三晩 = 1770-1847), one of the top three famous writers of Joseon who was born by Honam and revitalizing the Shenyang business. It was held at the Multimedia Center on the first floor and drew extraordinary interest from the academic world.

 

The symposium was held on this day Trends of Samman Lee's calligraphy research in Changam and the current state of Shenyang Argument for Samman Lee's 'Jeongeup birth theory' in Changam The historical significance and value of Samman Lee's calligraphy Direction of Samman Lee's Shenyang project in Changam and how to promote major contents Comprehensive discussion was conducted with

 

Even if the efforts of the pioneers or the very difficult research of academia continues, this paper often renders these efforts simply worthless, or ignores other local governments or The academic conference is published three times with the hope that the case of the cultural heritage of Jeollabuk-do being devalued compared to the cities and provinces will not be repeated.

 

While the argument that for a new era, not only new politicians, but also some administrative officials should be reborn as new civil servants suitable for this era, rather than the attitudes of the past investigators, is gaining persuasiveness, It is hoped that the academic conference for revitalizing research and fostering projects related to Lee Sam-man (李三晩) will be the last alarm bell for public officials. <Editor's Note>

 

Hosted by the Jeongeup Research Society and jointly organized by the National Research Institute of National Culture and Chonbuk National University’s Nongak Pungmul Gut Research Institute, the first prelude to the conference opened with a presentation by former Professor Ok-Young Bae of Wonkwang University and Professor Ik-Doo Kim of Chonbuk National University.

 

First, Professor Bae uncovered the problems of Professor Lee Sam-man (李三晩) of Chang-am(蒼巖) that have been carried out so far, such as achievements and trends in calligraphy research difficulties in the sluggish Shenyang project.

 

Professor Bae explained, "Until now, the Shenyang business group, which was founded in 2001 by Jeonju Chairman Kwon Gap-seok, as well as calligraphers and journalists, was the first to launch the 'Changam Lee Sam-man Memorial Business Association' by 150 people," said Professor Bae.

 

He continued, "The 'Changam Thousands of Seonyanghoe' was launched with calligraphers such as Kim Young-gu and Lee Jeong-in, and the Changam Calligraphy Contest has been held to this day." ‘Changam Lee Sam-man Teacher Seo Arts and Culture Promotion Association’ was founded, conducted research and research for about a year through a consortium with Chonbuk National University, and published ‘Changam Lee Sam-man Teacher’s Yumuk Book’ in 2005.”

 

He continued, "So far, the Shenyang project of Samman Lee in Changam has been carried out, resulting in a total of 49 research results, including 8 related books, 2 doctoral dissertations, 5 master's dissertations, and 34 general dissertations. Cooperation between organizations in Jeonju and Jeongeup has not been achieved, so it is not producing clear results,” he pointed out.

 

Professor Kim Ik-doo of Chonbuk National University focused attention by presenting as "the oldest book found to date as the closest evidence to support the theory of Lee Sam-man's birth in Jeongeup. made it

 

In particular, he said, "In the last sugyeol at the bottom of the bibliography of Changam, 'Jeongmyo, April 16, the foundation was written in a seowon. Changam'. It is impossible to specify where, but it is presumed to be 'a hill near Seoraebong Peak of Naejangsan Mountain'."

 

Also, "Like the writing of Seokdam Seokdam in Bumusil, where the writing of Changam is written, 'The birthplace of Lee Samman in Changam,' Bumusil is a village near Seoraebong Peak in Naejangsan Mountain, and it is a village facing Seoraebong Peak." was given as an example.

 

In addition, "In the book, Chang-am described himself as the foundation (箕樵), which means that he was a woodcutter who lived in the same deep mountains as Kishan (箕山), where Heo Yu (許由) lived in Sobu, China. "In this respect, it means that at the time Chang-Am wrote the book, he was living a life like a 'woodman' in the present office in Bujeon-dong, Jeongeup-si, deep in the mountains, not in the bustling Jeonju."

 

Also, "If you look at the 'Shinpyeon Jeongeup Gunji' published in 1957, Changam Lee Sam-man was born on September 28, 158 years ago, to Gyeongin, Yeongjo, the second son of Ji-cheol in Jeonju, to a poor family in the Bumu-sil of Dong-myeon, Jeongeup-hyeon. Ji-cheol, who has a strong personality with the same physique as he is, left Jeonju, Jeolla-gamyeong to find a protest against the harsh system in hermitage, and went to a remote village in the mountains. It was transferred to ”, he introduced the record.

 

He continued, "Some people claim that Changam is from Jeonju with the content of 'Jeonjuin', but that only means 'Jeonju Lee'. "The time when I visited Jeonju, where Changam had turned, was in the 1830s, after the age of 50, and there were a lot of stone carvings written by Changam near the Seodang of the Choi Byung-shim (1874-1957) family behind Hanbyeokdang in Gyo-dong." emphasized that

 

However, "In Jeonju, for some reason, there is a sign that says 'the birthplace of Changam'. There is a record that he was born on September 28 in Bumu-sil, east-west of Jeongeup, Bubu-ri, Naejang-myeon, Jeongeup-gun," he added.

 

In addition, "Another record related to Changam, 'Jeonju Yasa (1967)', contains the conversation between a fan and Chang-am. It's a small thing, you can't attract people's eyes." Like the conversation, "People staying at Daesup House Woldang Teacher Damgong Choi's private residence after telling them to look around the castle with a fan with the inscriptions on it."私塾),” he claimed.

 

In addition, "As the basis for claiming the birth of Jeonju by some, the Jeonju Busa published in 1943, at the end of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states, 'He was born in Jeonju on September 28, in the 46th year of King Yeongjo (庚寅 = 1770), and was born in Jeonju, the 13th year of King Cheoljong's 2nd year. There is a record of 'He died in Jeonju on the 12th of the month, and he died at the age of 78', but as if to amplify this record, 'The History of Jeonju,' published in 1967, clearly nailed the birthplace of Changam to Jeongeup," he emphasized.

 

He continued, "In Jeonju Yasa, Changam was the son of Ji-cheol, a Jeonju-in on September 28, the 46th year of King Yeongjo's (1770) year, named Gyu-hwan. "Some reports say that he was born in Jeongeup, but when I asked the family, he argued that he was born in Jeonju with the content that 'I know that it is reasonable to accept the news that he was born in Wansan, father'" he said.

 

He continued, "As a clear basis for the Jeonju birth theory, 'I asked the family and they heard that he was born with a father in Wansan.' There is no," he specifically stated.

 

Finally, "In this respect, there are currently two theories about the birth of Changam, Jeongeup and Jeonju, but if you look at the various theories comprehensively, it is clear that although he came from the Wanpa family of the Jeonju Yi clan, his father moved to the village of Bumusil, Bumu-dong, Bujeon-dong, Jeongeup, and was born here." He said, "I moved to Jeonju in my early 50s and devoted myself to Seodo from Gyo-dong, Jeonju, which was mainly Okryu-dong/Jaman-dong, Jeonju, until the late 60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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