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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암 이삼만' 선양사업 활성화… 학술대회(중)
창암의 서체를 '한국 서체'로 새롭게 명명하자
이용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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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22/06/21 [1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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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남이 낳은 조선의 3대 명필 창암(蒼巖) 이삼만(李三晩 = 1770~1847) 선생에 관련된 연구 및 선양사업 활성화를 위한 학술대회가 전북대 사범대학 본관에서 열리고 있다.                                / 사진 = 이용찬 기자     © 이용찬 기자

 

▲  전북대 허정주 박사가 '창암 이삼만 선생 선양사업의 방향'과 '주요 콘텐츠 추진방법' 등을 발제하고 있다.     © 이용찬 기자

 

▲  글자 한 자 마다 뱀이 한두 마리씩 담겨 있는 형태의 글로 유명한 창암의 작품 '삼광수색(三光水色)' (정읍지역에 전승되고 있는 뱀막이 민속 얼마나 강렬한 것이었는가를 방증해 주는 자료이다.  / 사진제공 = 사단법인 민족문화연구소 김익두 소장                                                                                                                                       © 이용찬 기자



 

 

 

 

호남이 낳은 조선의 3대 명필 창암(蒼巖) 이삼만(李三晩 = 1770~1847) 선생에 관련된 연구 및 선양사업 활성화를 위한 학술대회 2부 첫 발제에 나선 성균관대 조민환 교수는 우리나라에서 서예창작에 임하기 이전에 행했던 조선조 서예가들의 서풍을 철학적인 측면에서 2가지로 설명했다.

 

먼저, 유가의 중화 미학을 중심으로 동진(東晉)의 왕희지원대의 조맹부조선조 한호가 지향한 서예 미학으로 성즉리(性卽理)를 기반으로 한 서풍이 있었다.

 

다른 하나는 '천기(天機)''생활(生活)' '성령(性靈)' 등을 강조하는 원교(圓嶠) 이광사(李匡師 = 1705~1777)의 양명심학(陽明心學) 차원의 서풍을 제시했다.

 

이런 점에서 2가지 서풍을 철학적인 측면에 적용하면, 왕수인(王守仁)이 주장하는 심즉리(心卽理) 차원의 경향으로 법고 차원에만 얽매이지 말고 자신의 진정성을 과감하게 펼칠 것을 주장했다.

 

, 일정 정도 광기(狂氣)를 띤 서풍으로 나타난 것으로 조선조 서예계를 통관할 때 이상과 같은 서풍이 펼쳐진 정황에 앞의 두 서풍과 달리 매우 독특한 서풍의 서예 세계를 펼친 인물이 나타났는데 그가 바로 창암이었다고 한다.

 

창암의 서체는 이광사를 추존했지만 한 걸음 더 나아가 노장철학에 입각한 서풍을 펼쳤다는 점에서 이광사 서풍과도 차별점이 있다.

 

조선조에서는 봉래(蓬萊) 양사언(楊士彦 = 1517~1584)고산(孤山) 황기로(黃耆老 = 1521~1567) 등을 위시한 몇몇 서예가들이 노장사상을 근거로 서풍을 전개해 초성(草聖)이라 불리기도 했지만 창암은 '우졸(愚拙)'이란 용어를 사용하며 노장의 창신적 차원의 광기를 완성했다고 밝혔다.

 

우리나라 서법은 대략 3번 변했다.

 

국초는 촉체(蜀體 = 송설체)를 배웠고 선조와 인조 이후로는 한석봉체를 배웠다.

 

근래(18세기 초)는 진체(晉體 = 왕희지체)를 배웠다.

 

하지만, 조귀명(趙龜命)은 조선조에서 '진체 습득'의 문제점을 "근래에는 진체를 배워 짜임새와 법도가 점점 나아졌지만, 골기는 쇠약해졌다. 진체는 변화를 모색하여 얼른 보기에는 중국과 핍진하지 않음이 없는 듯 하지만 그 실제는 눈썹과 머리털만 흉내 낸 것이다"라고 평가 절하했다.

 

이유원은 "우리 동쪽에 이르러 서학이 크게 융성했으니 김생의 해서양사언의 초서가 진대의 쇠함을 이어서 일으켰다. 후에 한석봉이 해서의 올바름을 얻었고 윤순이 동방에서 파천황을 행했다. 이광사는 진한의 의발을 이어받아 대소전(大小篆)을 잘했는데 글씨를 공부하는 자로서 전서와 예서(隸書)로 쓰인 고비로부터 입분하지 않는 자는 함께 의론할 자가 못 된다"며 당시 인들의 비루한 견해를 한탄했다.

 

이유원은 이광사가 '진한의 의발'을 이어받았다는 견해와 함께 동진의 왕희지 중심주의에서 벗어나 학귀심득(學貴心得)의 사유를 체화한 상태에서 출발해 자신의 주체적인 서예 미학을 전개했는데 창암은 이런 이광사를 추존하면서도 한 걸음 더 나아가 노장의 '우졸' 정신을 자신의 서예 세계에서 펼치고자 하였다는 특징이 있다.

 

서거정(徐居正)"우리나라의 필법은 김생이 제일이다. 학사 요극일(姚克一), 승려 탄연(坦然)과 영업(靈業)이 버금가는데 모두 왕희지를 법으로 삼았다"고 했고 홍경모(洪敬謨)"우리나라 글씨는 신라 김생에서 뿌리를 두는데, 김생의 붓은 기굴하고 오묘하여 고인을 스승 삼지 않고 스스로 문호를 열었다. 그러나 그 신골의 독예(獨詣)는 암암리에 '이왕(二王 = 왕희지와 왕권지)'과 합한다"고 말했다.

 

예로부터 필력을 강조하는 광견미학적 서풍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의소종(意所從)'은 무위 자연적인 붓놀림을 의미한다.

 

'의소종''수의소종(隨意所從)'과 같은데 이런 운필법은 결과적으로 무법(無法)의 강조로 이어져 왔다.

 

이런 점에서 이삼만의 도법자연 정신에서 창암이 추구하고자 한 최고의 미적 경지는 '어리석은 듯하고 졸박한 것(愚拙)'이었다는 점에서 기세의 변화무쌍함을 담고 있는 '()()대담(大膽)' 및 졸과 박은 우아(優雅)함과 균제미(均齊美)정제미(整齊美)를 담아내고자하는 것이었다는 점에서 중화 미학과는 거리가 먼 일운무적(逸韻無跡)득필천연(得筆天然) 자연 천성의 필법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학술대회 2부는 기존의 동국진체(東國晉體)나 조선진체(朝鮮晉體) 등의 용어 또한 중국의 관점에서 우리의 서체를 설명하는 의미였다는 점에서 "기존 용어들 대신 창암의 서체를 '한국 서체'로 새롭게 명명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이 쏟아졌다.

 

한편, 이번 학술대회는 정읍시가 주최하고 ()민족문화연구소정읍학연구회전북대 농악 풍물굿연구소가 주관하고 전북연구원이 후원했다.

 

그동안 창암 이삼만에 관한 사람들의 많은 관심은 있었으나 정작 그와 그의 서도 및 서도 예술을 어떻게 현실적으로 제대로 기릴 수 있을 것인가에 관한 연구와 활성화 방안들은 거의 논의된 적이 없었다.

 

아래는 위 기사를 구글 번역이 번역한 영문 기사의 '전문' 입니다.

구글 번역은 이해도를 높이기 위해 노력하고 있으며 영문 번역에 오류가 있음을 전제로 합니다.

Below is the 'full text' of the English article translated by Google Translate.

Google Translate is working hard to improve understanding, and assumes that there are errors in the English translation.

 

Activation of 'Changam Lee Sam-man' Shenyang businessAcademic conference (middle)

Let's rename Changam's typeface as 'Korean typeface'

 

Reporter Lee Yong-chan

 

Prof. Min-Hwan Cho of Sungkyunkwan University, who gave the first presentation of the 2nd part of an academic conference for research related to Lee Sam-man(李三晩 = 1770~1847), one of the top three famous writers of Joseon born by Honam, and revitalizing the Shenyang business, taught calligraphy creation in Korea. From a philosophical point of view, the west wind of the Joseon Dynasty calligraphers was explained in two ways.

 

First, centering on the Chinese aesthetics of Confucianism, there was a west wind based on Seongjeonri as the aesthetics of calligraphy pursued by Wang Hui-ji of Dongjin, Jo Maengbu of Wondae, and Hanho of Joseon Dynasty.

 

The other is the dimension of Yangming Psychology of Wongyo Lee Gwangsa(李匡師 = 1705~1777), emphasizing 'Cheongi(天機)', 'Life' and 'Holy Spirit' presented the west wind of

 

In this respect, if the two west winds are applied to the philosophical aspect, he insisted that he boldly unfold his sincerity without being bound only by the level of beopgo, as Wang Suin(王守仁) insists on the dimension of simjeonri(心卽理).

 

In other words, it appeared as a west wind with a certain degree of madness, and when customs clearance of the Joseon Dynasty calligraphy world, a person who unfolded a very unique west wind calligraphy world, unlike the previous two west winds, appeared, and it was Changam. do.

 

Although the font of Changam admired Lee Gwang-sa, it is different from the Western style of Lee Gwang-sa in that it went one step further and developed a west wind based on the old-fashioned philosophy.

 

In the Joseon Dynasty, some calligraphers, including Bongnae Yang Saeon(楊士彦 = 1517-1584) and Gosan Hwanggiro(黃耆老 = 1521-1567), developed a west wind based on the old-fashioned ideology and developed a western wind, and became the first saint. Although it was called 'Woo-Jol', Chang-Am said that he had completed the madness of the old man's ingenuity.

 

Korean calligraphy has changed approximately three times.

 

Gukcho learned the body(蜀体 = songseolche), and after King Seonjo and King Injo, he learned the body of Han Seokbong.

 

Lately (early 18th century), I learned the true body(晉体 = Wangxiji body).

 

However, Jo Gwi-myeong(趙龜命) explained the problem of 'acquisition of the true body' in the Joseon Dynasty, saying, "Recently, the structure and method have gradually improved by learning the true body, but the skeleton has weakened. It seems that there is nothing wrong with it, but the reality is that only the eyebrows and hair are imitated."

 

Lee Yu-won said, "In our east, Western studies prospered greatly, so Kim Saeng's Hae-hae and Yang Sa-eon's Chauceo continued the decline of Jindae. He lamented the pitiful views of the people at the time, saying, “I am a person who studies the calligraphy, and who does not enter the battlefield written in the Jeonseo and Yeseo (隸書).

 

With the view that Lee Gwang-sa inherited 'Jinhan's clothes', Lee Yu-won broke away from the centralism of Wang Hui-ji in Dongjin and developed his own subjective calligraphy aesthetics, starting from the state of embodying the thought of a scholarly person. While admiring Lee Gwang-sa, he went one step further and tried to spread the old man's 'woo-jol' spirit in his calligraphy world.

 

Seo Geojeong(徐居正) said, "In our country, the writing method of Kim Saeng is the best. It is second only to Yogeukil(姚克一), a monk, Tanyeon(坦然) and a businessperson(靈業), all of which are made by Wang Huiji as the law." ) said, "Korean calligraphy has its roots in Gimsaeng in Silla, but Kim Saeng's brush was crafty and mysterious, so he opened his own door without taking the deceased as a teacher. and Wang Kwon-ji),” he said.

 

'Uisojong', which is closely related to the geek-aesthetic west wind that emphasizes handwriting since ancient times, refers to natural brushstrokes without action.

 

'Uisojong' is the same as 'Suisojong'(隨意所從), but this unwriting method has resulted in the emphasis on lawlessness.

 

In this respect, in the sense that the best aesthetic state that Chang-Am sought to pursue in the spirit of Sam-Man Lee's teaching nature was 'foolish and naive,' 'Wei () and Dan()' containing the ever-changing momentum Boldness(大膽) and pawns and gourds(逸韻無跡) are far from Chinese aesthetics in that they were intended to capture elegance, uniformity, and refinement(整齊美). Natural writing style(得筆天然) It can be said that it was a natural writing method.

 

In the second part of the conference, the existing terms such as Dongguk Jinche(東國晉体) and Joseon Jinche(朝鮮晉体) also meant to explain our typeface from the Chinese point of view. It would be better to rename it as 'Korean typeface'."

 

On the other hand, this academic conference was hosted by Jeongeup City, hosted by the National Research Institute of National Culture, the Jeongeup Studies Research Society, and the Nongak Pungmul Gut Research Institute of Chonbuk National University, and sponsored by the Jeonbuk Research Institute.

 

In the meantime, there has been a lot of interest from people in Changam Lee and Samman, but there has been hardly any discussion on research and revitalization plans on how to properly honor him and his calligraphy and calligraphy a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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