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가 광복을 맞은 지 70년이 되었지만, 피해의 역사는 아직도 정리되지 않은 채 우리의 기억 속에서 희미해져가고 있다. 그나마, 당시 조국을 위해 목숨 바친 독립투사들은 교과서나 위인전 등을 통해 재조명 되고 있지만, 지역에서 활동했던 위인들의 발자취를 재조명하는 시도는 희박한 가운데 전북도립국악원 창극단이 우리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이석용이라는 걸출한 의병장과 이름 없이 스러져간 민초들의 모습”을 무대 위에 되살리는 역사문화컨텐츠를 준비해 특별한 의미를 담고 있다. / 편집자 주
▲ 전북도립국악원 창극단이 제48회 정기공연 "천둥소리"를 통해, 조국의 독립을 위해 순절한 구한말의 호남의병장 정재 이석용과 민초들의 고귀한 희생정신을 되새긴다. / 사진제공 = 전북도립국악원 공연기획실 최정학 © 이용찬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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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립국악원(원장 윤석중) 창극단(단장 송재영)이 제48회 정기공연 “천둥소리”를 통해, 조국의 독립을 위해 순절한 구한말의 호남의병장 정재 이석용과 민초들의 고귀한 희생정신을 되새긴다. 이번 “천둥소리”는 오는 11일과 12일 총 3회에 걸쳐 한국소리문화의전당 모악당 무대에 올려진다. “천둥소리”는 광복 70주년과 명성황후 시해사건 2주갑을 맞이하여 전북도립국악원이 기획‧제작한 작품으로, 우리 지역의 역사를 무대화함으로써 정체성을 확인하고 역사 의식을 다시 한 번 생각해볼 수 있는 자리가 될 것으로 예상된다. 그동안 전북도립국악원은 지역의 역사와 문화자원을 무대화해 역사문화의 고장으로써 우리지역의 정체성 확립에 심혈을 기울여 왔다. 권삼득과 견훤, 매창, 논개 등의 인물은 물론이고, 정읍지역에서 시작돼 우리나라 근현대사를 결정지은 역사의 일대 사건인 동학농민혁명운동 등 전북 지역에서 벌어진 굵직한 일들을 작품으로 제작해 도민들에게 선보여 왔다. 특히, 이번에 무대에 올려지는 “천둥소리”는 창작창극으로 조선의 국권이 일본군과 매국노에 의해 강제찬탈당한 시기를 배경으로 제작됐다. 총 2막에 걸쳐 16장으로 구성된 이번 창극은 이석용이 의병을 일으켜 조국의 독립을 위해 치열하게 활동하다가 일제에 잡혀 사형 당하기까지의 모습을 따라간다. 극은 명성황후가 시해되기 전, 한판 줄다리기가 펼쳐지는 매우 흥겨운 임실 풍경으로 시작한다. 그러다 명성황후가 시해되고 일본군의 본격적인 침략으로 무대는 격정적으로 치닫는다. 이런 모습에 이석용이 조선의 현재를 개탄하며 나라를 위해 일어서는 모습과 신분과 상관없이 나라를 위해 일어나는 평민과 천민의 모습이 그려진다. 더 더욱, 중간 중간의 전쟁을 묘사하는 모습과 농민군들의 각오를 나타내는 합창은 의기에 차 매우 역동적으로 그려진다. 마지막 장면은 웅장하면서도 미래의 비전을 제시하는 느낌이 들도록 빠른 템포의 장단에 구음으로 배경을 깔아 전라도 특유의 토리(지역마다 가지고 있는 음악적 특징)를 살려낼 수 있도록 구성됐다. "천둥소리" 연출을 담당한 오진욱씨는 “이번 작품은 우리 전라북도의 정체성을 드러낼 수 있는 콘텐츠와 국악의 본향으로써 전라북도립국악원이 가진 최고의 역량이 결합하여 제작된 작품”이라며, “현대의 관객들이 함께 감동받고 공감할 수 있는 작품이 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영상 등을 활용해 극의 전개를 빠르게 하고, 극적 긴장감을 늦추지 않게 하는데 공을 많이 들였다”고 말했다. 창극 “천둥소리”는 전북도립국악원을 비롯 현재 전북지역과 수도권을 중심으로 활발한 창작활동을 펼치고 있는 최고의 제작진들이 만나 만들어져 관심도가 후끈 달아오르고 있다. 한편, 전라북도립국악원 윤석중 원장은 “이번 작품은 광복 70주년을 맞아 그동안 재조명 된 적이 없었던 구한말 우리지역의 의병장과 민초들의 이야기를 다룬다는 점에서 아주 의미 있는 공연”이라고 설명했다. 윤 원장은 특히 “이번 공연은 무려 10년 만에 선발한 신입 단원들이 주요 배역으로 출연하는 만큼, 꼭 참석해 신입단원 충원으로 더욱 역동성 넘치는 우리 국악원의 작품을 확인해줄 것”을 당부하고 나섰다. 전북도립국악원은 보다 편안한 공연 관람을 위해 공연 1주일 전부터 홈페이지를 통한 사전 예약제를 실시하고 있다. 또한, 예약을 하지 못한 관객을 위해 공연 당일 1시간 30분, 현장 좌석권을 선착순 무료 배포한다.
☞ 정재 이석용 = 이석용은 1878년 임실군 성수면 삼봉리에서 삼대독자로 태어났다. 그가 열일곱 살이던 1894년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났고, 1895년에는 명성황후 시해와 단발령 강제 시행이 벌어졌다. 1905년에는 일제에 의해 강제적으로 을사늑약이 체결되면서, 호남에서는 최익현과 임병찬이 의병을 일으켰다. 이석용도 한걸음에 달려가 합류하려 했으나, 최익현과 임병찬이 일으킨 의병은 열흘 만에 해산되고 만다. 이석용은 아예 직접 의병을 일으켰다. 1907년 이석용은 진안 마이산에서 고천제를 지내며 ‘호남창의소’라는 의병을 일으킨다. 의병을 일으킨 지 하루 만에 이석용이 이끄는 부대는 진안읍의 일본 관청과 친일파 단체인 일진회를 공격해 대승을 거두며 전라북도 일대에 그 이름을 떨친다. 대대적인 일본군의 반격으로 인해 많은 동지들을 잃음은 물론이거니와 이석용 자신도 겨우 목숨을 건져 한동안 지리산 일대를 전전하게 된다. 이석용은 바로 그 해에 다시 일어선다. 그리고 그동안의 경험을 바탕으로 보다 강력한 의병조직을 만들기 위해 무기의 성능을 높이고 내부규율을 만드는 등 조직 정비에 심혈을 기울였다. 이런 노력들을 바탕으로 다시 강력한 항일 투쟁을 전개해 나가지만 이마저도 잠시, 일제의 집요한 탄압으로 이석용은 결국 의병을 해산하고 산속에 숨어들게 된다. 그가 의병을 처음 일으킨 지 3년 만인 1909년의 일이다. 이후 와신상담하던 이석용은 군자금 후원을 약속했던 친구의 배반으로 1913년 한인 순사에 의해 잡히고 만다. 1914년 2월 시작된 재판은 일사천리로 진행돼 이석용은 며칠 만에 사형판결을 받는다. 회유하던 재판장 앞에서도 ‘역적을 죽이지 못한 것이 한’이라고 당당하던 이석용은 ‘아비 걱정 말고, 조부모와 어머니, 형제끼리 우애하며 지내라’ 아들에게 당부하고, 그해 4월, 대한민국 만세를 세 번 부르고 왜적을 멸하겠다고 맹세한 후 형장의 이슬로 순국한다. 그의 나이 서른일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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