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나라 후기 의병장 (사진 왼쪽부터) 송병운, 오성술, 이강산, 오천년, 강우경, 이영준, 뒷줄 왼쪽부터 황장일, 김원국, 양진여, 심남일, 조규문, 안규홍, 김병철, 강사문, 박사화, 나성화. / 사진제공 = 전주역사박물관 학예연구원 김소희 © 이용찬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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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주역사박물관 2층 기획전시실에 전시된 "전해산 진중일기". / 사진 = 김현종 기자 © 이용찬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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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지역에서 유림들이 주축으로 일어났던 의병 운동은 1906년 병오년(丙午年) 무성창의(武城倡義)이후 그들의 영향을 받아 기삼연을 중심으로 다시 일어났던 호남창의회맹소(湖南倡義會盟所)와 이석용을 중심으로 또 다시 일어났던 의병창의동맹(義兵倡義同盟)’과 전해산을 중심으로 일어났던 대동창의단의 활동 등을 수 있다.
그밖에도 호남 지역을 벗어나 외부에서 활동하며 호남의 의병진을 더욱 독려케 했던 김동신, 고광순 의병대의 약진 또한 현재의 전북지역의 의병들을 자극 했던 주요 요인 중 하나였다.
당시의 김동신, 고광순 의병대에 대해 일제는 “폭도의 수괴는 김동식(김동신-필자 주) · 고광순” 이라고 했을 만큼 두 의병장은 전라북도 의병의 선구자였다.
무성창의 이후 호남 지역에서 활동했던 후기 의병은 1907년 7월 20일 고종황제의 강제퇴위 등의 사건들을 거치면서 의병항쟁 또한 초기 유생 의병들의 전통적인 왕도질서의 존중이나 양반 등 계급의식에서 비롯된 특권의식 등 빈약한 한계를 극복하며 오직 일제의 주권 침해에 대해서만 양반, 상놈계급이 힘을 합해 줄기찬 민족적 저항운동으로 펼쳐졌다.
그런 반면 일제는 1908년 후반부터 호남의 후기의병들을 시종 폭도로 규정하고 체포하는데 혈안이 되어 있었고, 그에 따라 일제는 호남의병들을 완전한 일망타진을 위해 강력한 군사작전을 모색했는데, 이른바 ‘남한폭도대토벌작전(南韓暴徒大討伐作戰)’이 바로 그것이다.
당시 일제가 전개한 이 작전은 단기간에 호남의병들을 싹쓸이 하겠다는 계획으로 잔혹한 살육과 방화는 물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무차별적 토벌 작전으로 펼쳐졌고, 이 기간 동안 사망한 의병들은 조선총독부의 조사 집계에서도 무려 17,840명에 달했다.
일제가 1910년 도쿄에서 발간한 “남한폭도대토벌기념사진첩南韓暴徒大討伐記念寫眞帖”은 2000년 초경, 우리나라 학계에 알려졌는데 이 사진자료집에는 당시의 ‘작전’으로 체포된 의병장들의 모습이 담겨있었는데, 그 대표적인 사진이 바로 ‘폭도거괴(暴徒巨魁)’라고 표기한 우리나라 후기 의병장 16명의 사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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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는 당시 16명의 의병장들을 송병운, 오성술, 이강산, 오천년, 강우경, 이영준, 뒷줄 왼쪽부터 황장일, 김원국, 양진여, 심남일, 조규문, 안규홍, 김병철, 강사문, 박사화, 나성화 의병장이라고 밝혔다.
일제의 이른바 그 ‘작전’ 이후 국내에서의 의병항쟁은 현실적으로 큰 타격을 입었고, 1910년 8월 29일, 일제의 조선에 대한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 대한 공식적인 천명 이후 일제의 무단통치 하에서 우리의 민족운동 세력들이 선택할 수 있었던 것은 비밀결사 조직을 통한 항일항쟁 뿐이었다.
따라서 1910년부터 결성된 비밀결사 조직은 한말 국권회복운동의 전통을 발전적으로 계승해 3·1운동과 그 이후의 한국 독립운동을 지속적으로 이끌었던 주체 세력이었다고 볼 수 있는데, 당시의 전북지역에서 대표적으로 두드러졌던 항일항쟁 인물이 바로 임병찬이었다.
1913년 1월 10일 전 참판 이인순(李寅順)이 임병찬을 찾아와 당시의 면소(免疏)에 대한 비답(批答) 및 밀조(密詔), 칙명 등을 전하기도 했는데, 1914년 2월 4일에는 아들 응철이 집으로 돌아오며 황칙을 받아왔는데 ‘종2품 가선대부 임병찬, 명 독립의군부 전라남북도 순무총장 겸 사령장관’이라는 밀지였다.
그에 따라 3월 25일, 임병찬은 직접 서울로 올라가 고종황제의 측근을 만나 ‘정2품 자헌대부 독립의군부 육군부장 전라남북도 순무총장’에 임명한다는 조명(詔命)을 받았다. 이에 임병찬은 이명익, 이인순 등과 협의하여 독립의군부의 편제를 조직, 각도 대표를 선정하고 두 손자에게 진안, 장수, 무주, 용담, 금산, 진산, 고산, 익산 등 8군을 돌아 충신을 찾았다.
1914년 5월 3일 임병찬은 다시 함경남도 관찰사 겸 순무총장에도 임명되어 독립의군부의 조직을 북한지방까지 확대를 추진했다.
그러나 같은 달 23일, 동지 김창식(金昌植)이 일경(日警)에 체포되어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독립의군부의 조직을 자백함으로써, 독립의군부의 국권회복운동은 시작 단계에서 중지되며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현재까지 국가 보훈처에 등록된 우국지사는 의병이 230명으로 가장 많고, 그와 관련된 인물이 223명, 국내 항일운동 154명, 학생운동 22명, 광복군 12명, 그 나머지는 모두 10명 이내인데, 그중 구한말 당시 정읍출신으로 항일운동에 참여했던 인물들로는 백정기 의사를 비롯 거론되는 이름만도 100여명에 이른다.
이후 전북에서의 두드러진 활동은 1919년 3.1만세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으로 전북출신 박준승과 백용성이 참여했던 것과 천도교와 개신교의 조직망을 통해 전북 전 지역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났던 사건을 들 수 있다.
학생들이 중심이 된 학생 항일운동도 눈에 띈다.
1926년 순종의 인산일을 기해 일어난 6.10만세운동의 주모자 학생 11명 가운데 이동환을 비롯한 4명이 전북출신이었고 신흥학교와 기전학교는 신사참배를 거부해 1937년 폐교되기도 했다.
특별히 이번 전시에서는 전해산의 작전용 지도와 진중일기, 이석용 서간, 김상기 교지, 신흥학교, 기전학교 화병대, 장태수 초상화와 어사화, 염재야록, 정암사고 등이 일반에게 처음 전시될 예정이며, 광복회에서 소장하고 있던 독립운동가들의 영정도 함께 전시돼 각별한 의미를 담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