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읍시 영원면 일대의 마한‧백제 고분군의 국가 사적지 지정을 위한 학술 심포지움이 지난 21일 정읍시청 5층 대회의실에서 열리고 있다. © 이용찬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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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21일 정읍시청 5층 대회의실에서 열린 영원면 일대의 마한‧백제 고분군의 국가 사적지 지정을 위한 학술 심포지움 발제자로 나선 주요 참석자들. © 이용찬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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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정읍시 영원면 일대의 마한‧백제 고분군의 국가 사적지 지정을 위한 학술 심포지움이 지난 21일 정읍시청 5층 대회의실에서 진행된 가운데 마한 기층문화와 백제 사비시대 중방문화권에 대한 보존과 이를 통한 정읍시의 문화콘텐츠 개발이 시급하다는 의견이 제기됐다.
정읍시(시장 김생기)와 정읍문화원(원장 김영수)이 공동 주최하고 (재)전북문화재연구원(이사장 최완규) 주관으로 진행된 이날 심포지움에서 원광대 최완규 교수는 '백제 중방문화권내 마한 기층문화와 백제'라는 기조 강연을 통해 "전북 서부권 지역의 고대문화의 특징은 강력한 마한문화에 기반을 둔 백제문화의 성립을 영원면 일대의 분구묘에서 확인할 수 있다"고 말했다.
특히, "동진강 유역인 정읍과 부안‧김제 황산면‧죽산면‧부량면 일대의 분구묘의 특징들이 국내 최대의 농경유적인 벽골제와 인접해 있고 백제 중방 고사부리성에 대한 발굴조사 확인결과, 이 지역이 지방 통치와 밀접하게 관련돼 있다는 사실이 밝혀진 만큼, 마한의 기층문화와 백제 사비시기의 중방 고사부리성에 대한 학술적 정립이 시급하다"고 주장했다.
최 교수는 또 "취락시설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분구묘를 배치하는 전통은 인근 장성의 환교유적에서도 확인되었듯, 정읍지역 마한문화의 특징은 지사리나 운학리에 남아 있는 마한 분묘 축조전통에서 그 원형을 발견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밖에도 "마한 전기 고대의 기층문화는 동진강 유역의 여러 지역에서 나타나고 있지만 마한 후기의 기층문화는 현재의 정읍시 영원면의 지사리‧운학리 일대에서 집중적으로 나타고 있는 만큼, 이 지역과 인군 고부로 이어지는 백제 중방 고사부리성의 역사적 연결성을 조사해 백제 후기 중앙통치 체계에 대한 학술적 정립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밝혔다.
아울러 "이들 고분의 축조시기에 대해서도 웅진 2식의 E호분은 6세기 초엽 그리고 같은 방식으로 축조된 웅진 3식은 6세기 중엽이었던 반면 사비 2식에 해당하는 고분은 웅진시대 유형의 축조방식과는 달리 중방 고사부리 성으로 위치를 갖는 시기에는 백제의 중앙과 밀접한 관계를 나타내는 방식으로 역시 6세기 중엽에 축조된 것으로 밝혀져 추가 조사 필요성"을 제기했다.
이어, 최 교수는 “벽골제와 같은 대규모 토목공사의 경우, 고대 중앙집권적 국가가 아니고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사업이었던 만큼, 벽골제의 시축연대와 축조집단에 대한 성격규명 등의 연구를 통한 강력한 정치세력들에 대한 연구들이 이어져야만 이후의 마한과 백제, 사비시대의 고사부리성으로 이어지던 역사적 개연성과 상호 관련성들이 밝혀질 수 있다”고 덧붙였다.
그 이유에 대해서도 마한에 이어 백제의 중방성 지역으로 현재의 영원면 지역이 치소가 되기 이전에도 영원면 지역에서는 웅진 2식과 웅진 3식의 고분이 위치해 있었을 만큼 이전부터 강력한 정치세력들이 있었고, 벽골제의 축조 또한 고비리국이나 벽비리국 연합 세력들이 벽골제를 축조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가능성을 일본서기 신공기(49년)의 기록을 통해 내비쳤다.
또한, 전주대 김주성 교수는 '백제 지방통치조직의 변화와 중방성'이라는 논문을 통해 백제는 사비시기에 지방통치조직으로 5방성을 실시했는데 전국을 동‧서‧남‧북‧중의 5개 구역이 그것”이라고 밝혔다.
이어 “현재의 고부와 영원면 일원이 중방 고사부리성 이었을 만큼, 사비 시기의 중방성은 매우 중요한 지리적 위치에 있었지만 이에 대한 연구는 거의 없었다”고 말했다.
김 교수에 따르면, 고대 백제는 사비 이전까지 수도를 예맥족의 순수 우리말인 '고마성'으로 명명하고 전국을 22개 담로 체제로 통치하다 사비 천도 이후 5방 군성 체제로 변환했다.
이 과정에서 담로와 읍륵을 주요 거점지역으로 파견해 약 200여 년 동안 통치 체제를 유지했다.
백제는 고구려와의 오랜 분전 끝에 장수왕의 침공으로 475년 웅진으로 수도를 천도했다.
당시의 행정체제는 방-군-성의 체제로 지방은 5방‧37군 200현으로 운영됐다.
백제 부흥 전쟁 중 가장 치열했던 지역은 중방성 지역이다.
여러 학설로 인해 확정되지는 않았지만 백제 부흥기 662년의 중방성 패배 후 웅진 도독부의 고사주가 중방성의 체제를 이어 받았다면 당시의 주류성은 현재의 부안 위금암산성‧고사주의 대산현(帶山縣)은 현재의 정읍 태인이다.
태인에는 3개의 영현이 있었는데 정읍현은 현재의 정읍시‧빈성현은 정읍 정우면‧야서현은 김제시 금산면 일대다.
백제 부흥운동과 관련, 여러 지명들이 나타나고 있는데 좌찬현(佐贊縣)은 본래 상두(上杜)이다.
백제지에는 상칠현(上柒縣)으로 기록된 현재의 고창군 흥덕으로 비정되고 있다.
중방성에 대한 기록에 따르면 남쪽 260리에 있으며 둘레가 150보이고 병사 1,200명이 상존했다.
중방성은 험준한 지형에 위치해 있어 본래의 중방성은 고부 성황산 해발 133m 지역이 아닌 해발 229m의 금사동산성이 그 중심이었을 것으로 사료되며, 좌우에 소성은 고부구읍성과 천태산이 지리적으로 적합해 보인다, 등으로 내용을 압축할 수 있다.
연구논문 발표 이후 이어진 종합토론에서는 군산대 곽장근 교수의 "마한은 강력한 해양 문화를 이어오던 세력이었다, 그러한 측면에 대한 연구가 아쉬움으로 남는다"고 지적했다.
또한 이 자리에서는 현재 정읍시가 국가 사적지 지정 의견을 문화재청에서 반려한 입장을 심정보‧최성락 전문위원들이 반려 사유에 대해 설명하는 자리도 마련됐다.
정읍시의 입장은 6세기 초엽의 웅진 2식의 E호분은 고분과 6세기 중엽의 웅진 3식을 비롯해 역시 중방성 시기의 또 다른 사비식 고분 2식 등 전체 약 270여기 고분 지역 전체에 대한 국가 사적지 지정에 대한 요청이 공식적으로 정읍시 문화재전문위원을 통해 재 구두 요청이 이뤄졌다.
최성락 전문위원은 이에 대해 "햔장의 고분 분포지역을 돌며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 하나는 이 엄청난 역사적 유물들이 아직까지 사적지로 지정되거나 학계에 알려지지 않았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이 엄청난 유물들이 임의대로 파헤쳐져 지역을 알리는 상품으로 전락되어 있어 현장 보존 원칙상 현재 상태로는 국가지정 사적지 등록이 힘들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한편, 최완규 교수는 "늦은 감도 없지 않지만 이제부터가 마한의 기층문화와 백제 중방 고사부리 문화를 재발견하는 첫 시작이 이루어진 것"이라며 "이제부터는 정읍시 의지에 따라 모든 방향이 좌우될 수 있다"고 적극적인 관심을 촉구하고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