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수리스크 고려인 문화센터에 옛 고려인들의 태극기가 전시돼 있다. ©이용찬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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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대 국어국문학과 연해주 학술문화기행 둘째 날 일정은 한국시간으로는 06시, 블라디보스토크 현지 시간으로 오전 7시에 시작됐다.
서둘러 조식을 완료한 기행단은 총연장 9,288km에 이르는 시베리아 횡단철도의 시발점이자 종착역인 블라디보스토크 역사와 극동 고려인 1만여 명이 살고 있는 우수리스크로 이동하기 위해 버스에 몸을 실었다.
현지 가이드 정무순씨는 "본의 아니게 자꾸 다그쳐 미안하다"면서도 "예정된 일정보다 더 일찍 서둘러 줄 것"을 주문했다.
이유는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블라디보스토크 역시 출근시간대 교통체증이 심하고, 그로 인해 열차를 탑승하지 못할 경우 예정된 하루 일정이 뒤틀릴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궂은 날씨와 계속되는 교통체증 속에서도 버스는 정확히 열차 출발 1~2분을 앞두고 역사 앞에 도착했고, 학술문화기행단 일행들 또한 짧은 시간 빗속을 뛰고 뛰어 출발 직전 시베리아 횡단 구간 내 블라디보스토크 →우골리나야 구간 시트 열차에 탑승할 수 있었다.
화장실이 마련되지 않은 기차를 이용해 우골리나야 역에 도착한 일행은 하나뿐인 이 역의 화장실을 이용하기 위해 약 30여 분 동안 긴 줄을 서야했고, 일부는 다음 목적지인 우수리스크 ‘수이푼’식당의 화장실을 이용하기 위해 발을 동동 구르며 버스에 올라야 했다.
▲ 우골리나야 역사에서 바라본 시베이라 회당열차 철로. © 이용찬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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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리스크 ‘수이푼’식당에서도 화장실을 이용하기 위한 긴 줄은 통로 좌우 15m 이상을 뭇 사람들의 행렬로 채우게 했다.
식당에 들어서서도 가이드는 여전히 기행단의 뒤를 쫓아다니며 “한꺼번에 식사를 다하지 마세요, 다양한 요리가 차근차근 나오니 현지 음식을 조금씩 천천히 다 음미하시면서 드세요”라며 채근했다.
이곳에서 처음 학술문화기행단 여학생들은 둘이 함께 화장실에 들어가 마주앉아 볼일을 보고? 나오는 독특한 러시아식 화장실 문화를 체험했다.
남학생들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대규모 식당에 남, 여 각각 두 곳 뿐인 화장실을 서둘러 이용하기 위해서는 본의 아니게 둘씩 차례로 화장실에 들어가야 했기 때문이다.
중식 후 학술문화기행단이 향한 곳은 고려인 문화센터였다.
고려인 문화센터에서는 연해주에 거주하는 고려인들을 ‘연해주의 불꽃’이라는 제하의 제목으로 연해주 고려인들을 소개하고 있었다.
이곳에서 학술기행단은 연해주의 크기가 한반도의 1.68배 정도, 인구는 약 220만 명이며, 그 수도는 블라디보스토크, 그리고 이곳의 인구가 약 90만 명이며, 우수리스크의 인구는 약 14만 명으로 우리나라 제천 만 한 크기라는 사실을 알았다.
1860년 북경조약 체결 이후 청나라가 현재의 연해주 지역을 러시아에 환원하게 되면서 러시아가 호구조사를 하게 되었는데, 이 당시 최초로 조사된 연해주 ‘지신허 마을’의 1세대 고려인들의 가구는 13가구인데 조사 당시 그 수가 이미 999명이었다고 했다.
▲ 고려인 문화센터에 전시된 우리나라와 마주하고 있는 중국과 북한, 러시아 등 국경을 확대 표기한 지도./ © 이용찬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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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인은 1863년 최운보 등 함경북도 경원 지방에 살던 13가족 60여명이 두만강을 건너 지금의 러시아의 영토였던 연해주 ‘지신허 마을’에 첫 정착을 하게 되면서 그 역사도 시작됐다.
현재 ‘지신허 마을’중국과 러시아의 국경지대여서 경비초소가 들어서 있고 사람은 살지 않는다.
연해주로 이주한 고려인은 1863년 최운보 등 함경북도 경원 지방에 살던 13가족 60여명이 처음 두만강을 건너 지금의 러시아 영토인 연해주 ‘지신허 마을’에 첫 정착을 하게 되면서 그 역사도 시작된다.
그 이전에도 농사철에 두만강을 넘어 농사를 짓던 조선인들이 있었지만 본격적인 고려인의 이주 역사는 이때부터로 보는 것이 통례다.
이후로 매년 이주하는 조선인 인구도 늘어났는데, 이는 고려인의 연해주 이주가 하와이 농업 이민 보다 무려 반세기를 앞선 최초의 해외 개척 역사였다는 것이다.
연해주의 고려인들은 1869년 우리나라에서 있었던 대 흉년을 거치며 한꺼번에 6천여명의 조선인들이 집단 도강을 통해 연해주로 이주했다.
때문에 이주 20년만인 1880년대 중반 연해주 고려인은 약 1만 여명이었고, 통계에 잡히지 않았던 인구까지 합하면 3만 명이 넘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후 연해주의 황무지는 고려인들에 의해 옥토로 바뀌었고, 한반도 국경지역에서 블라디보스토크 등지를 잇는 도로도 놓여졌다.
하지만 1860년 베이징 조약으로 청나라로부터 속칭 `얼지 않는 항구' 블라디보스토크가 포함된 연해주를 얻었고, 이곳 러시아인들에게 고려인은 신천지 개척을 위한 노동력이자 국경지역의 골치 아픈 이민족으로 비춰지기도 했다.
▲ 고려인 문화센터에 전시된 의암 유인석의 초상. © 이용찬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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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문에 그들은 훗날 고려인들에 대한 반감으로 강제귀국 또는 내륙지방으로의 강제이주를 강요하는 정책을 펼쳐지기도 했다.
그들이 왜 스스로를 고려인이라 명명했는지는 분명치 않다.
다만 당시의 현지인들이 초기 조선인 이주자들을 `카레이츠'(코리언)라고 부르던 것을 그대로 직역했을 가능성이 크고, 연해주가 항일항쟁의 전진기지가 되면서 뜻있는 독립지사들이 고구려, 고려의 후손이라는 역사의식 속에서 스스로를 고려인이라 했던 것이 자리매김 됐을 가능성이 크다고 했다.
어쨌거나 옛 선인들의 땅은 1880년대 중반부터 1,000년여의 단절을 접고 연해주 곳곳에 고려인 마을들이 들어서기 시작했고 그들은 스스로를 ‘고려사람, 고려인’이라 칭하기 시작했다.
이후 1874년 최초의 한인촌 '개척리'도 만들어 졌다.
하지만, 1911년 당시의 구소련은 콜레라 창궐을 구실로 ‘개척리’의 고려인들을 시 외곽으로 강제 이주시켰다.
강인한 고려인들은 그곳을 새로운 한인촌이라는 의미의 ‘신한촌’이라는 더 크고 단단한 마을을 만들었다.
‘신한촌’에는 민족학교가 들어섰고, 일제의 침략에 맞서기 위한 독립 운동가들이 속속 이곳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연해주에 뿌린 희망과 생명의 씨앗은 드넓은 대지에서 서서히, 그리고 깊숙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 헤이그에 파견됐던 세 밀사, 좌측부터 이준, 이상설, 이위종./ © 이용찬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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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연해주에 뿌려진 씨앗은 항일 독립운동의 불꽃으로 피어났다.
그 시작은 두만강 연추 지역이었다.
이곳을 시작으로 본격화된 항일전선은 최초 1901년 대한제국 당시 초대 러시아 상주 공사로 부임했던 이범진(李範晉, 1852~1911) 이었다.
이범진은 1905년 을사늑약으로 국가의 외교권이 박탈되자 일본의 소환 명령을 거부한 채 대한제국 황제의 특사로 항일구국활동을 펼쳤다.
1907년에는 아들 이위종을 헤이그 밀사로 파견했고, 이후 연해주 항일의병 조직인 ‘동의회’의 결성에도 참여케 했다.
▲ 고려인 문화센터에 전시된 안중근 의사가 결성한 비밀 결사대‘동의단지회’의 독립의지 천명 후 무명지 단지 후 대한독립을 맹세하며 썼던 혈서 ©이용찬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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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일제의 조선 강점이 완료되자 1911년 끝내 목을 매 생애를 마감했다. 최후까지 목숨을 걸고 일제에 항거했던 그의 유해는 상트페테르부르크 우즈벤스크 묘지 제8구역에 안장돼 있다.
연해주 지역의 항일조직은 1908년 4월, 당시 연해주 최대의 부호였던 최재형(崔在亨, 1858~1920)을 주축으로 이범윤(李範允, 1852~1911), 이위종(李瑋鍾, 1885~1920?) 등이 연추(현재의 크라스키노) 지역에서 의병단체 ‘동의회’를 결성하며 시작됐다.
당시 연추 지역은 국내 진공 작전을 전개하던 의병들의 주요 근거지였다.
▲ 고려인 문화센터에 전시된 연해주 최대 항일조직 권업회의 초대 회장 최재형 선생의 사진./ © 이용찬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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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년 일제에 의해 강제협약인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1909년 ‘동의회’ 소속의 의병이던 안중근 의병장은 단원 12명과 함께 비밀 결사대 ‘동의단지회’를 조직했다.
이들은 독립의 결연한 의지를 천명하기 위해 연추의 ‘카리’에 모여 왼손 무명지를 잘라 대한독립을 맹세하고, 일본의 수장 이토 히로부미를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 역에서 저격, 살해했다.
이 무렵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에는 학교가 세워졌고, 신문(희조신문, 대동공보)이 발행됐다. 고려인들의 항일투쟁도 뜨겁게 달아올랐다.
1910년 연해주에서는 의암(毅菴) 유인석(柳麟錫, 1842~1915)의 주도로 13도 총 의군이 결성되기도 했다. 하지만 그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1910년 일제의 의한 한·일 강제 합병조약이 체결되고 말았다.
이에 연해주의 고려인들은 일제의 조선강점에 대한 무효를 선언하고, 연해주의 대부 최재형을 중심으로 항일단체 ‘권업회’를 창단했다.
또한 신문을 만들어 독립의 당위성을 홍보하고 공한지에는 사관학교를 세웠으며, 대한광복군정부(정통령 이상설)를 결성했다.
하지만 거대한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일제와 제휴한 구소련은 연해주의 ‘권업회’와 대한 광복군 정부를 해체하고 말았다. 그러나 고려인들의 불꽃같은 항일의지는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뜨겁게 피어올랐다.
1919년 2월 국내, 외를 통틀어 최초의 임시정부(대한국민의회)를 만들었고, 1919년 3월 1일 만세운동은 들불처럼 타올라 본토를 넘어 동토인 연해주에서도 뜨겁게 이어졌다.
이후 고려인들은 ‘대한국민 노인동맹단’을 조직했고, 노인동맹단의 단원이었던 강우규는 일본 총독 사이토의 마차에 폭탄을 투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