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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 독립운동 현장을 찾아… (4)
모진 땅에서 피어나는 들꽃 · 고려인의 강인한 생명력
이용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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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5/05/20 [2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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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북대학교 국어국문학과 학술기행 단원들이 우리나라 최초 임시정부 정통령(대통령) 이었던 이상설 선생의 유허지에서 위대한 뜻과 숭고한 정신을 기리는 긴 묵념을 올리고 있다.     © 이용찬 기자


 


일본 총독 사이토의 마차에 폭탄을 투척한 뒤 일제의 탄압은 무자비하고 잔인했다.
 
19204월 고려인 거주지를 습격한 일제는 마을을 불태우고 주민들과 최재형을 비롯 독립운동가 300여명을 사살했다.
 
그로 인해 1926년 러시아 내전 종결 이후 고려인들은 더 이상 독립운동을 전개할 수 없게 됐지만 고려인들의 불꽃같은 항일 의지는 우리들 가슴 속에 영원히 남아 있다.
 
특히, 항일운동이 잦아든 시기부터 고려인들에는 대대적인 고난이 시작됐다.
 
당시, 소비에트 정권이 펼친 소수민족 이주 정책에 따라 연해주의 고려인들은 19378월부터 모두 열차에 강제로 떠밀려 실려졌다.
 
그들이 추위와 배고픔을 견디며 도착한 곳은 중앙아시아의 너른 불모지의 척박한 냉한 지였다.
 
하지만, 불굴의 고려인들은 거기서 주저앉지 않았다.
 
맨손으로 땅굴을 파고 들어가 엄동설한을 견뎌냈으며 몰래 숨겨온 볍씨를 심어 황무지를 옥토로 개간해 나갔고 곧 그 황무지의 대부분이 옥토로 탈바꿈 됐다.
 
정성으로 가꾼 농장은 세상에 알려졌고, 노동 영웅들의 탄생이 줄지어 이어졌다.
 
모진 땅에서 피어나는 들꽃처럼 고려인은 그 강한 생명력으로 아름다운 꽃을 피워내기 시작했던 것이다.
 
고려인들은 그렇게 막막한 광양에서 다시금 삶의 불꽃을 환하게 피워 올린 이후 한 많은 고려인들에게 새 희망이 찾아왔다.
 
 


 
 
19334, 옐친 정부는 그동안의 정책에 대한 공식 사과 발표와 함께 고려인들의 명예회복법안을 채택하고 고려인들에게 채웠던 모든 속박과 구속을 풀었다.
 
중앙아시아에서 다시 연해주로 이주해온 고려인들은 다시금 선조들이 그랬던 것처럼 또 다시 광활한 대지를 옥토로 일궈 나갔다.
 
그리고 대립과 반목, 빈곤으로 얼룩졌던 동북아시아의 역사를 고려인들은 다시금 화해와 상생, 평화를 위한 힘찬 발 거름으로 시작했다.
 
작은 씨앗에서 불꽃으로 타올라 질긴 생명의 불꽃이었던 고려인, 희망의 산 증인이었던 그들이었기에 이 평화는 앞으로도 오랫동안 지속될 것이다.
 
인천에서 블라디보스토크까지의 직선거리는 807km 남짓이다.
 
이 거리를 비행기로 이동했을 경우 이동 시간은 대략 50여분이다.
 
하지만, 남북 분단의 현실 때문에 현재의 비행 항로는 중국을 거쳐 약 2시간 30여분을 돌아 러시아에 이르고 있다.
 
북한 영해를 지날 수 없기 때문에 공해상으로 나갔다가 다시 러시아 영해로 들어가야 하는 번거로운 항해를 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현재, 동해항 국제여객 터미널에서 블라디보스토크까지 약 24시간이 소요된다.
 
블라디보스토크는 북한의 나진 선봉지구와 연결된 국경이자 중국 북경과 러시아 핫산 지역과도 국경을 경계로 연결되어 있는 곳이다.
 
이 같은 상황 때문에 블라디보스톡은 일본과 한국, 중국과도 중간 지점에 위치해 있어 과거에는 군사적 요충지였지만 현재는 국제 무역 등 러시아의 주요 경제적 요충지로 발전해 나가고 있다.
 
학술기행을 위해 찾은 연해주 고려인 문화센터에서 전북대학교 학술기행 단원들이 한 결 같이 느꼈던 마음은 낮선 땅에서 다시금 가슴 뭉클하게 다가왔던 통일에 대한 강한 염원 바로 그것이었다.
 
 


 
고려인 문화센터에 이어 19115, 신한촌에 본부를 두었던 권업회의 초대 최재형의 옛 고택으로 이동했다.
 
최재형은 부회장 홍범도와 함께 우리나라 독립을 이끌었던 대표적인 인물이었지만 현재까지도 잘 알려지지 않은 애국지사다.
 
최재형은 1911년 당시 연해주 최대의 재벌이자 권업회(항일단체)’의 회장으로, 그는 전 재산을 털어 북만주에대전학교라는 사관학교를 세웠고, 1914년에는 연해주에서 처음 국내외를 통틀어 최초의 임시정부인 대한광복군정부 대한국민의회를 수립했던 인물이다.
 
1914권업회가 설립한 대한광복군정부는 블라디보스토크를 주요 근거지로 삼아 설립된 망명정부로 권업회는 이상설(정통령), 이동휘(부통령), 이종호, 정재관 등을 주축으로 흩어져 있던 무장 독립 단체들을 규합했고, 독립 전쟁을 수행할 정부로 만들어 갔다.
 
초대 임시정부 대통령이었던 이상설(李相卨, 1870~1917)1906년 용정에 민족학교인 서전서숙을 설립했으며, 1907년에는 네덜란드 헤이그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 고종의 특사로 파견되기도 했다.
 
부통령 이동휘(李東輝, 1873~1935)성명회, 13도의군, 권업회등의 핵심 인물로 1907년 의병봉기에 실패한 후 안창호 등과 신민회를 조직했던 인물이다.
 
 


 
 
일제는 이동휘가 소속된 신민회의 관련 인사 105인에 대해 데라우치 총독 미수 사건을 조작, 600~700여 명의 민족 지도자를 체포한 뒤 세계 여론의 비난이 쏟아지자 이중 105인에만 유죄판결을 내려 감옥에 수감한바 있다.
 
이후 연해주의 항일 독립운동은 한동안 소강상태에 놓였다가 러시아 혁명 직후인 1917521일부터 31일까지 러시아 전 지역의 고려인 대표 100여명이 다시 모였고, 11일 간의 회의 끝에 전로한족중앙총회를 조직, 우스리스크 체체리나 거리에 본부를 두고 활동을 재계했다.
 
연해주 고려인들은 당시의 전로한족중앙회의 활동을 기반으로 대한국민의회를 설립할 토대를 마련하였으며, ‘전로한족중앙회의 실체는 후에 한인사회당으로 이어졌고, 때문에 그에 대한 연구나 역사적 사실들 또한 역사 속으로 사라져 우리가 잘 알지 못하는 역사가 되었다.
 
1918년 일제는 시베리아 침략을 감행했고, 연해주 한인들은 일본의 침략에 맞서 19192월 우리나라 최초의 임시정부인 대한국민의회를 수립하기에 이른다.
 
당시, 임시정부는 3·1운동을 계기로 일제와의 혈전을 다짐하며 문창범, 이동휘, 최재형, 김철훈 등이 중심으로 의연금 모집과 군사 훈련소 설치 등을 주도했고, 19198, 상해임시정부와 합병했다.
 
그 모든 일련의 배후에는 늘 최재형이 있었고, 19204, 일제가 고려인 거주지를 습격해 고려인들의 마을을 불태우고 주민들과 최재형을 비롯 독립운동가 300여명을 사살함으로써 연해주에서의 항일투쟁도 종식될 수밖에는 없었고, 연해주 고려인들의 대대적인 고난도 시작된바 있다.
 
열차로 중앙아시아 냉한지에 버려졌던 고려인들은 이주 이듬해 7,000명이 사망했고, 그 다음 해에는 4,800명이 숨졌을 만큼, 모진 학대와 혹한의 추위를 견뎌내며 농토를 개간하고, 숨겨간 볍씨를 심어 불모지를 옥토로 일구며 연해주 고려인의 강인한 생명력을 발휘했다.
 
고려인 문화센터에서 나온 전북대학교 학술기행단은 곧바로 당시 연해주에서 모든 항일단체들을 이끌던 권업회(항일단체)’의 회장 최재형 선생의 옛 거주지로 향했다.
 
당대 연해주의 최대 부호였다는 최재형 선생의 집은 계속된 항일단체에 대한 사재 출현 때문이었는지 의외로 초라해 보였고, 학술기행 단원들의 가슴을 아프게 짓눌렀다.
 
최재형 선생의 거주지를 뒤로하고 학술기행단이 오후 두 번째 행선지로 찾은 곳은 우리나라 최초의 임시정부 정통령(대통령) 이었던 이상설 선생의 유허지였다.
 
우스리스크시 교외에 위치한 선생의 유허지는 레로몬토바 거리를 향해 외각으로 나가 솔다트스코예 호수를 지나 라즈돌리노예 강가에 위치해 있다.
 
전북대학교 학술기행단은 이곳에서 유허비를 어루만지며 선생의 위대한 뜻과 숭고한 정신을 기리는 긴 묵념을 올렸다.
 
둘째 날, 마지막 코스는 우리 민족의 기원이 되었던 곳으로, 고조선에 이어 고구려, 발해로 이어졌던 옛 발해의 성터를 둘러보는 코스다.
 
이곳에 이르러서야 학술문화기행단은 오후 여정 내내 침울하고 답답했던 가슴을 고구려와 발해의 땅에서 그 기상을 만끽함으로써, 새 희망과 부푼 희망을 가슴으로 담아내는데 충분했다.
 
발해는 고구려의 모든 양식을 흐트러짐 없이 올곧게 계승했던 나라로 학술문화기행단은 이곳에서 이전까지는 경험할 수 없었던 드넓은 고구려 웅대한 기상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곳은 애써 증명하려 하지 않아도, 이곳이 우리민족의 뿌리이자 약속의 땅이었다는 것을 한 마음으로 느낄 수 있었다.
 
전북대학교 학술기행단과 함께 숙소로 향하는 발 거름도 어느 때보다 가벼웠다.
 
 

▲  전북대학교 국어국문학과 학술기행 단원들이 우리나라 최초 임시정부 정통령(대통령) 이었던 이상설 선생의 유허지에서 통일에 대한 강한 염원을 드러내며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 이용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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