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해주 항일투쟁의 역사
▲ 우수리스크 고려인 문화센터 고려인 역사관에 전시된 연해주 쉬코토보 한인 독립군 부대사진./ © 이용찬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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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해주의 주요 항일투쟁의 역사는 1901년 대한제국 초대 러시아 상주 공사로 부임한 이범진이 1905년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이 박탈되자 항거에 나서며 시작됐다.
그는 1907년 고종에게 헤이그 파견 밀사로 이상설과 이준, 그리고 그의 아들 이위종 등을 추천했다.
고종은 이해 4월 그중 이상설을 정사로 이준과 이위종을 각각 부사로 임명 헤이그에 밀사로 파견했다.
세 특사는 7월 14일, 당시 네덜란드 언론인 W. 스테드의 주선으로 니콜라이 2세가 네덜란드 수도 헤이그에서 소집한 제2회 만국 평화 회의를 계기로 마련한 ‘국제협회’에서 발언권을 얻어 이위종의 유창한 프랑스어와 영어, 러시아 어 실력으로 대한제국의 비통한 실정을 호소하기도 했지만 평화회의장 입장은 영·일 정부의 방해로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
그 과정에서 부사 이준이 의문의 죽음을 당했고, 헤이그 아이큰다우 공원에 묻혔다.
일제는 당시의 사건을 구실로 남산에 포를 배치, 위협하며 광무황제의 퇴위를 강요했고, 이때 이상설은 황제가 결사순국을 해서라도 결단코 조약을 막아야 한다는 전무후무한 상소를 올리기도 했지만 광무황제는 끝나 을사늑약을 막지 못하고 퇴위(退位)하고 말았다.
광무황제의 퇴위와 함께 8월 1일 강제 정미칠조약(丁未七條約)이 체결됐고, 일제는 당시 국왕과 수도 서울을 지키던 시위대마저 강제 해산시켰다.
그 과정에서 조선의 시위대와 일본군 간의 격렬한 시가전이 곳곳에서 이어졌다.
이 당시 상황을 지켜보며 교육운동이나 결사운동과 같은 비폭력적 방법으로는 일제에 항거하는 일이 한계가 있다고 판단한 안중근은 국외활동을 통한 새로운 진로(進路) 모색하다 위기에 처한 민유중을 발견했고, 이들은 위기를 피해 고려인들이 상주해 있던 연해주로 망명했다.
안중근의 연해주에서의 첫 의병운동은 1907년 11월께 연해주에서 창설된 초기 의병대였고, 이때 총독(總督)은 김두성, 총대장은 이범윤이었다.
안중근은 참모중장을 맡았다.
의병부대의 규모는 대략 2-300명 내외였다.
이 과정에서 안중근은 최재형을 만났고, 1908년 초 최재형, 이범윤, 이위종, 홍범도 등과 연해주 연추 지역에서 의병단체 "동의회"를 결성했다.
‘동의회’ 결성 당시 최재형은 군자금으로 1만 3천루불 이라는 엄청난 거금을 출현했고, 안중근은 이해 3월(혹은 4월 초, 학계의 주장이 다름) ‘동의회’ 소속 단원들 가운데 12명을 뽑아 비밀 결사체 ‘동의단지회’를 조직했고, 구국 의지를 천명하며 왼손 무명지를 끊고 ‘대한독립(大韓獨立)’네 글자를 혈서로 썼다.
▲ 안중근 의사가 결성한 비밀 결사대 ‘동의단지회’의 독립의지 천명 후 무명지를 단지 하고 썼던 대한독립 혈서 ©이용찬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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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안중근과 ‘단지혈맹동지’를 맺은 회원들은 안응칠(안중근, 31세), 김기룡(30세), 강순기(40세), 정원주(30세), 박봉석(32세), 유치홍(40세). 조응순(25세), 황병길(25세), 백규삼(27세), 김백춘(25세), 김천화(26세), 강창두(27세) 등 12명이다.
‘동의단지회’를 조직한 안중근은 최재형의 지원을 받아 의거를 위해 현재의 중국 둥베이 지역(옛 만주)으로 일부 단지회 회원들과 건너갔고, 이해 10월 25일, 의거에 만전을 기하기 위해 하얼빈 역을 의거의 주여 거점으로 확정했다.
이어, 10월 26일, 오전 7시경 역으로 나간 안중근은 삼엄한 경비망을 뚫고 역사 안 찻집에 머물며 이토 히로부미의 도착을 기다렸다.
오전 9시경 이토를 태운 특별열차가 하얼빈 역에 도착했고, 약 20분 뒤 이토 히로부미가 수행원들을 거느리고 러시아 코코프체프의 안내를 받으며 열차에서 내려 역 플랫폼으로 걸어오자 러시아 의장대 뒤쪽에 서 있던 안중근은 약 10여보의 거리를 두고 선 자세로 브로닝 권총을 발사하여 이토 히로부미에게 세발의 탄환을 명중시켰다.
일제는 당시의 사건을 ‘한일병합’ 이라는 명분 아래 사건을 축소하기에 급급했고, 당시 일본의 식민지이던 현 중국 대련시의 여순에서 재판을 받게 하며 한일합방이 아닌 ‘일한병합’ 이라는 명분을 위해 사건을 축소하며 안중근의 처형을 서둘렀다.
안중근은 재판과정에서 이토 히로부미의 죄상을 15항목으로 정리, 나열하며 의거의 정당성을 주장 했다.
안중근이 당시 여순 법정에서 나열한 15개 항목은 다음과 같다.
1. 한국 민 황후를 시해한 죄요.
2. 한국 황제를 폐위시킨 죄요.
3. 5조약과 7조약을 강제로 체결한 죄요.
4. 무고한 한국인들을 학살한 죄요.
5. 정권을 강제로 빼앗은 죄요.
6. 철도, 광산, 산림, 천택을 강제로 빼앗은 죄요.
7. 제일은행권 지폐를 강제로 사용한 죄요.
8. 군대를 해산시킨 죄요.
9. 교육을 방해한 죄요.
10. 한국인들의 외국 유학을 금지시킨 죄요.
11. 교과서를 압수하여 불태워 버린 죄요.
12. 한국인이 일본인의 보호를 받고자 한다고 세계에 거짓말을 퍼뜨린 죄요.
13. 현재 한국과 일본 사이에 경쟁이 쉬지 않고 살육이 끊이지 않는데 태평 무사한 것처럼 위로 천황을 속인 죄요.
14. 동양 평화를 깨뜨린 죄요.
15. 일본 천황 폐하의 아버지 태황제를 죽인 죄이다.
안중근이 밝힌 15개 조약 중 14번만 실현되지 않은 내용이었고 나머지 조항들은 구체적인 실례(實例)였다. 요약하면 자유를 침해한 것, 사람을 죽인 것, 거짓말 한 것 등으로 요약할 수 있다.
이토 저격 사건에 대한 국내의 반응은 컸지만 언론 또한 일제의 혹독한 탄압 때문에 단신의 ‘사실보도’에 그쳤다. 이 당시 블라디보스토크 지역에서는 최재형이 "대동공보"에 400루불을 보내 안 의사의 는 의거를 대대적으로 게재케 하며 적극적인 항일투쟁의 계기로 삼자고 보도했다.
1895년 중ㆍ일 전쟁에서 패했던 중국에서는 안중근 의사가 이토를 처단하자, 안중근이 중국을 대신하여 원수를 갚았다며 살신성인의 영웅이라고 극찬했고, 신해혁명을 주도했던 손문(孫文)은 예송시를 지어 찬양하며 한·중 양국민의 공동 항일투쟁의 계기로 삼았다.
일본에서는 요미우리신문과 경성일보 등이‘흉보’라는 머리글로 일제히 속보를 내보냈다.
또한, 당시 그가 의병운동의 대표적 인물이었던 만큼, 그에 대해 다각도의 조사가 이루어지기도 했다.
▲ 안중근 의사의 순국 이틀전인 1910년 3월 24일 모습./ © 이용찬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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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는 1910년 3월 26일 오전 10시께 안중근의 사형을 서둘러 집행했고, 안중근 의사는 그렇게 여순 감옥 교수형장에서 32세의 나이로 순국했다.
일본정부는 안중근의 유해가 밖으로 나갈 경우 항일투쟁 커다란 계기가 될 것이라 판단했다.
때문에 의사의 시신을 여순 감옥 죄수 묘지의 다른 유해들과 함께 매장함으로써 현재까지도 그 정확한 위치가 밝혀지지 않아 유해가 아직도 고국의 품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한편 안중근이 떠난 연해주에서는 귀화 러시아파와 조선의 정치적 망명자들 간의 갈등이 1908년 초부터 최재형과 이범윤의 갈등으로 증폭되기 시작했고, 1909년 1월 급기야 이범윤의 부하들이 최재형을 저격, 최재형이 중상을 입는 사건이 발생했다. 최재형은 다행이 목숨은 건졌지만 그로인해 양대 세력은 돌이킬 수 없는 관계로 갈라서야 했다.
안중근 의사가 순국했던 1910년 3월 26일 이후, 최재형은 안 의사의 식솔들을 연해주로 불러들였고, 일제로부터 가해질 수 있는 2차, 3차적 위험으로부터 안 의사의 가족들을 지켜내기도 했다.
1911년 2월에 작성된 일본의 첩보자료에 따르면 “안중근의 의거 이후 안의 동생인 안정근, 안공근이 얀치혜에 빈번하게 출입했으며, 안중근의 처자가 얀치혜의 최재형 집에서 쉬고 있다”고 보고하고 있다.
이렇듯 윤봉길 의사의 배후에 김구 선생이 있었다면, 안중근 의사의 배후에는 늘 최재형이 있었다.
연해주의 항일조직 ‘동의회’의 조직원 이었던 안 의사는 사실상 최재형의 자금과 비호 아래에 있었고, 그의 의거가 가능토록 했던 실질적인 후원자였던 셈이다.
안 의사의 순국 후, 약 5개월 뒤인 1910년 8월 29일 한일합방이 공식적으로 발표됐고, 일제는 러시아 보노키예프스크 얀치혜에 거주하는 최재형을 체포하기 위해 혈안이 되었다.
하지만 이미 러시아로 귀화한 최재형의 체포는 여의치 않았고, 일제는 1911년부터는 본격적으로 러시아의 손을 빌어 아예 그를 처치하고자 했으나 그 또한 여의치 않았다.
연해주 의병들은 1910년 한일병탄 이후에서 이미 스러져버린 조선의 구국을 위해 기존의 의병들이 다시금 ‘독립군’이란 이름으로 일어섰지만, 1917년 러시아 사회주의 혁명의 발발과 함께 연해주에서의 독립운동은 소강상태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는 사이 일제는 1918년 대대적인 시베리아 침략을 단행했고, 당시까지도 연해주 일대에서 활동하던 독립군들은 1919년 2월 일제에 대항하기 위해 최초의 임시정 ‘대한국민의회’를 수립하고 대대적인 항전에 나섰지만 일본 본군의 화력 앞에서 수많은 독립군들이 희생된 채, 최초의 임시정부마저 상해로 그 주체를 옮겨야 했다.
그러자 일제는 1920년 4월, 대규모 부대를 블라디보스토크 고려인 마을 ‘신한촌’으로 보냈고, 대대적인 학살과 방화를 자행했다.
이때 최재형을 비롯한 연해주의 항일투사 300여 명 대부분이 모두 목숨을 잃었다. 연해주 역사에서는 이를 `4월 참변'이라 칭한다.
▲ 1918년 시베리아를 침공했던 일본은 1920년 4월, 연해주 일원의 한인촌에 대규모의 부대를 진격시켜 최재형을 비롯한 항일투사 300여 명을 무참히 학살하고 주거지를 불태웠다. © 이용찬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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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연해주에서의 항일독립 무장투쟁은 1921년 당시 고려공산당 내 이르쿠츠크파와 상해파간의 고려인 군대 지휘권을 둘러싼 대립이 있었고, 급기야 러시아군이 상해파를 무장 해제시키고 수 백여 명을 사살하는 `자유시사건'이 발생해 연해주에서의 독립운동도 종지부를 찍고 말았다.
러시아 혁명 이후 정권을 잡은 스탈린은 1937년부터 `원동지방에서 일본첩자들이 침투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한 것'이라며 고려인들에 대한 대규모 강제이주를 시작했고, 그때부터 고려인들의 험난한 수난의 강제이주 역사가 시작됐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