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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시 울려 퍼진 그날의 함성
정읍 태인 JCI, 3·1 독립 함성 역사적 재현 각별한 의미
이용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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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5/03/01 [2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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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96주년 3·1 독립만세 운동에 참여한 정읍시, 정읍시의회, 시민단체, 35사단 4대대, 유관기관 단체장 등이 거리 퍼레이드를 펼치고 있다.     © 이용찬 기자


 
올해로 제96주년 3·1절 행사가 전국 각 지역에서 울려 퍼진 가운데, 전북 정읍에서도 또다시 1919년 그날의 함성을 재현하는 뜻 깊은 행사가 태인 JCI(태인청년회의소,회장 김인규) 주관으로 마련됐다.
 
정읍 태인면 지역에서 진행된 이번 행사에 정읍3·1운동유족 및 독립유공자, 정읍시장을 비롯 각 유관기관 단체장, 정읍시민, 각 사회단체, 지역 학생 등 1,500여 명이 참석해 뜻 깊은 그날의 함성을 재현했다
 
이날 재현 행사는 오전 10, 정읍 태인 초등학교 대강당에서 개최된 기념식을 필두로 옛 5일 장이 열리던 네거리 장터까지 약 2의 거리 퍼레이드와 장터 네거리에서  1919316, 또 다시 재현된 태인 독립만세운동 퍼포먼스를 끝으로 갈무리됐다.

 

 

▲  태인 중·고등학교 학생들이 대형 태극기를 펼쳐보이고 있다.     © 이용찬 기자

  
 

1919316일 태인 네거리 장터 이뤄진 대한독립만세운동은 35, 인근 군산(옥구)에서 촉발됐던  호남지역의 만세운동이 점차 익산, 전주를 거쳐 태인으로 확산된 우리 민족의 일제에 대한 대 항거였다.
 
당시, 정읍 태인에서 펼쳐진 대대적인 독립만세운동은 또 다시 오수, 남원, 만경 등지로 확산되기에 이른다.

 

태인 만세운동은 현재의 정읍시인 정읍, 고부 태인 주민들에게 언제난 잔잔한 감동으로 이어져 오고 있는 만큼, 각별한 의미를 담고 있다. 
 
태인 만세운동의 역사는 약 50여 년의 역사를 자랑하며 재현 행사를 통해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불과 10여년에 불과하다.
 
태인 만세운동은 현재까지 이름만 전해지고 있는 애국지사 "송수연 ,김현고, 송한용"등 3명이 주도했던 쾌거로, 191935일 처음, 야음을 틈타 현재의 태인면 '오리마을'고목 밑에서 몰래 만나면서부터 시작됐다.

 

 

▲ 일본 헌병 기마대 복장으로 참여한 기수단이 거리 퍼레이드를 펼치고 있다.     © 이용찬 기자

 

이날 3명의 애국지사는 처음 거사 방법을 논의한 7일후 1855(철종6) 당시 태인 현감 이승경이 선비들의 문학을 장려하기 위해 건립했던 한 정자 읍원정 (揖遠亭)을 근거지로 삼아 차후의 거사 진행을 모의하기로 협의했다

 
이후 부유한 가정 출신으로 오성학교 학생이던 송문상과 김달곤도 책가방을 집어던진 채 오직 나라를 되찾겠다는 일념으로 태인 거사에 참여했고 최종 거사일은 태인 5일장이 열리던 장날(316), 태인 헌병 분견소의 정오 타종 소리를 신호를 기점으로 장터에 모인 사람들이 함께 궐기할 것을 약속했다

거사를 위해 애국지사 김현곤은 독립선언서의 인쇄를 송문상과 김달곤은 태인 보통학교의 교원과 학생들의 동원을 맡았고, 송연수는 행사 진행을 지휘를, 송한용은 태극기를 만들었다.

 

 

▲  태인 중·고등학교 학생들이 태인 독립만세 재현에 나선 시민들을 일본 헌병 복장으로, 무차별 총기 난사 후 일부 시민들에게는 총검으로 찌르고 가혹한 폭행을 자행하는 퍼포먼스를 펼치고 있다.    © 이용찬 기자

 


그렇게 모든 준비가 314일 마무리 됐고 애타게 기다리던 16일 태인 네거리에 5일장이 섰다.

 

가슴을 졸이며 기다리던 태인 헌병 분견소에서 정오를 알리는 타종소리가 울리자 시장 곳곳에 숨어 있던 의혈 청년들이 가슴에 숨겨둔 태극기를 빼들고 일제히 "대한독립만세!" 를 외쳤다.
 
이때, 송연수를 선봉으로 거리로 뛰어나온 의혈 청년들은 조국 광복을 부르짖는 가두연설을 하며 대열을 지어 시위 행렬을 이끌었다.

 

당황한 일본 헌병들은 무차별적으로 총격을 가하고, 일부는 총검으로 시위대를 찌르고 때리는 등 가혹한 폭력을 가했다.

 

시위대는 흩어지며 인근의 항가산과 성황산으로 옮겨 다니며 이날 밤이 깊도록 독립 만세의 함성은 그치지 않았다.

 

당시, 거사에 참여했던 "권사옥"은 "김승권" 으로부터 공급받은 태극기를 들고 316일 출생지인 옹동면 신성리 뒷산에서 마을 사람들과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때 거사 주모자 100여 명이 일본 헌병에 붙잡혀 갔으나 태인 면민들과 시민들은 좌절하지 않고 며칠 여 동안이나 이웃 마을로 이동하며 독립만세를 외치는 시위를 계속했다. 

 

 

▲ 희생자들 사이를 일본 헌병 기마대가 둘러보는 퍼포먼스를 펼치고 있다.     © 이용찬 기자

 


이후 정읍 검사국으로 송치된 주모자 송연수, 김현곤, 김달곤, 송문상 등 열혈 청년 25명은 정읍 재판소에서 1심 판결을 받고 수년간 옥고를 치러야했다.

 

태인의 독립만세운동을 지켜본 정읍의 박환규, 이익겸 등은 321, 같은 방법으로 정읍 장터에서 만세운동을 준비했다.


하지만, 이들의 계획은 사전에 일본 헌병대에 첩보가 접수됐고, 정읍 장터에서의 거사는 끝내 무산되고 말았으며 박환규, 이익겸 등을 비롯 반란을 준비했던 애국지사들이 줄지어 내란 음모죄로 재판에 넘겨져 군산 형무소에 수감돼 옥고를 치뤘다.

 

 

▲ 시민들로 분장한 학생들이 태인 독립만세 운동을 펼치다 희생된 시민들 위에 대형 태극기를 덮고 있다.    

 


한편, 태인 JCI 김인규 회장은 "96년 전 태인에서 불거졌던 만세운동은 인근 정읍으로, 그리고 다시 오수, 남원, 만경 등지로 번지게 했던, 저항의 역사였지만 아직도 당시 참여했던 애국지사들에 대한 정확한 행적이나 그 유족들의 발굴, 조명할 행정당국의 지원이 없어 기념행사만으로 그날의 함성을 재현하고 있다"고 말했다.

 

 

▲ 태인 JCI 김인규 회장이 "태인 만세운동 당시 희생된 애국지사들에 대한 역사적 조명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내고 있다.      © 이용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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